추태화 소장 (이레문화연구소)
(1) [문화 이슈] 《더글로리》 문동은식 복수 정의 - YouTube
K-컬쳐, 한국문화의 힘
한국 문화의 세계화(globalization)을 두고 선교 현지에서 반기는 목소리도 들린다. 유행하는 한국 문화콘텐츠를 통해 복음 전파를 한결 수월하게 할 수 있다 한다. 한국 문화 유행이 해외에서 복음을 소개하는 한 접촉점으로 쓰일 수 있다 하니 긍정적 효과를 부인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그 내면의 실상을 관찰해 들어가면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소위 AS가 필요하다 본다. 하드웨어 부분이 아니라 소프트웨어 부분에서 그러하다. 컨텐츠의 내용, 정신, 사상, 가치관, 세계관을 무분별하게 혼용하고, 때로는 흥미 위주, 말초신경 자극, 대리만족의 기법으로 제작하다 보면 작품의 인기와 관계없이 그 후유증은 적지 않다. 아니 작품이 세계적 관심을 끌면 끌수록 후유증은 비례하여 부정의 결과를 남길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하겠다. 대중문화에 대한 복음적 접근이 요구되는 근거라 하겠다.
학교, 놀이터에서 지옥으로
드라마 <더 글로리> 시즌 1(2022.12, 김은숙 극본, 안길호 연출)이 한국 드라마의 힘을 이어가고 있다.
이 작품은 주인공 문동은 (송혜교 扮)이 학교 폭력을 당하는 과정과 그 상처의 결과를 생생하게 그려준다. 작가는 그동안 한국 사회의 병폐 중 하나인 ‘폭력’을 전면에 내세운다. 한국 사회 내에 폭력이 얼마나 다양한 집단 속에서 사회 문제가 되어 왔는지 셀 수 없다 (가정, 학교, 직장, 군대, 체육계, 연예계, 정치계 등등). 폭력은 사회의 특수 현상이 아니라, 보편 현상으로 인간의 죄라는 본성 안에 그 원인이 있다는 잠정 결론을 내리게 된다.
작가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폭력은 ‘좋은’ 소재가 아닐 수 없다. 공지영 작가가 소설 <도가니>로 성폭력을 이슈화 하고, 그 뒤 영화로 만들어져 엄청난 사회적 공분(公憤)을 불어일으켰다. 그 후 국회에서 입법으로까지 진전된 사실을 기억한다면, 작품은 단순한 소비재가 아닌 사회 공동의 양심과 재산이라 함이 옳다. 그런 면에서 <더 글로리>는 학교 내 폭력 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다시 불러냈다. 문제는 이 이슈가 개인의 복수극으로, 가해자들의 공멸로 관객의 대리만족을 제공하기는 하지만, 그 상황을 지켜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기에는 인간 조건(Conditio Humana)이 너무 비정하다는데 있다. 비록 “악인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시 9:6)라는 말씀이 적나라 하게 드라마 상에서 펼쳐지더라도 말이다.
문동은은 학교 폭력에 의해 철저하게 상처받고 버림받게 된다. 가해자들은 집단적으로 학우들을 왕따 시키고, 더구나 육체적 정신적 상해를 입히는 과정에서 왜곡된 성적 쾌락을 즐긴다. 새디즘(Sadism, 가학성 폭력)이다. 전기 고데기, 다리미 등으로 온몸에 화상을 입혀가며, 이를 탐익하듯 웃어제키는 그들은 거의 악마 수준이다.
루소에 의하면 학교는 정형화된 틀을 아이들에게 강요하므로 거부되어야 한다. 자연(Nature)에서 자연을 통해 성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동은에게 학교는 어떠했는가? 학교는 자신의 재능과 공부를 실현하여 자아실현을 이루어가는 자연이어야 했다. 그런데 학교는 동은이에게 지옥과 같았다. 탈출구 없는 감옥이었다.
‘신’을 부르지만, 구원이 없었다!
가해자들은 집요했다. 5명의 학생들, 영진, 혜정, 사라, 재준, 명오라 불리는 학생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인다.
그들은 동은을 격리된 체육관으로 불러내어 이유도 없이 괴롭히고 상처를 입혔다. “...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 항상 악할” 정도였다. 심지어 집에까지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 동은은 화상을 입어가며 울부짖는다. “누구 좀 도와주세요!” 그것은 어린 동은에게는 절대자를 향한 목매인 절규였다. 그러나 절규에 응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선하신 신”께서도 도움의 손을 뻗지 않는다. 동은은 전쟁의 광란에서 그저 온몸으로 상처입고 신음하는 병사처럼 ‘신의 부재’(Absence of God)를 경험한다. 마치 유대인들이 나치 폭력 앞에서 그러했듯이.
그래서 경찰에 신고한다. 하지만 담임선생에게 오히려 매를 맞으며 아픔이 가중된다. 학교는 조직적으로 이 사건을 은폐한다. 동은에게는 학교도, 경찰도, 가해자 부모들도 모두 한편이다. 동은이는 옥상 난간까지 밀려간다. 여기서 그녀는 결심한다. 복수가 동은이의 삶이 되고, 가해자들은 그녀의 존재 이유가 되는 순간이다. 처절하게 상처받고 혼자가 된 동은, 몸과 영혼에 깊은 패인 상처를 갖게 된다. 누구도 그녀의 복수에 관해 비난할 수 없으리라. 동은은 스스로 고백하듯, 자신의 존재 자체가 망가져 버렸다. 몸은 시도때도 없이 가렵고, 차라리 차가운 눈 속에 몸을 던져야 고통을 잊을 듯 했다. 삼겹살 굽는 소리에도 공황장애를 일으키는 자신을 보며 동은이 붙잡아야 했던 삶의 동기는 어떠해야 했을까?
여기서 “고난 받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말했어야 했을까? 아니면 “고난은 위장된 축복이다”고 표현해야 적절할까? 동은은 소돔과 고모라 같은 상황 가운데 던져진 그야말로 벌거벗겨진 실존이라는 현장에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누군가에 의해) 던져진 돌과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Das-ins-Dasein-geworfene-Sein, 하이데거). 여기에서 문동은이 복수를 삶의 목표로 결정한 것은 실존적 염려(existenzielle Sorge/독) 외에 다르게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들은 그 실존의 현장에서 염려라는 생명의 원초적 활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생명이 있는 한 살아야한다는 것은 절대 운명이다. 니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선과 악을 넘어선” 실존의 선택이었고 ‘권력에의 의지’(Wille zur Macht), 곧 생존에의 의지였다. 여기서 누가 동은의 복수를 정죄할 수 있겠는가!
과거 청산, 그 운명적 실존 과정
그렇다. 누구에게나 과거는 있다. 개인에게도 국가 차원에서도 역사의 과거가 있다. 모두가 그 과거 역사 때문에 갈등한다. 과거 청산이란 쉽지 않다. 문동은에게 과거는 온통 아픔, 상처, 분노, 좌절, 낙담, 절망 등으로 똘똘 뭉쳐있다. 가해자들이 그렇게 만들었기에 피해자인 동은은 책임이 없다. 일방적인, 고의적인 폭력에 의해 나락에 떨어진 자에게 ‘원수를 용서하라’고 말할 수 있는가? 무고하게 파멸당한 피해자에게 그 대적 원수를 용서하라고? 가해자 중 기독교인인 사라는 과거를 고백하고 용서받았다고 말한다. 그런 말이 동은이에게는 어떻게 들릴까? 여기서 영화 <밀양>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자신의 아이를 유괴 살해한 살인자를 용서하려고 찾아간 여인, 간신히 믿음으로 증오와 복수심을 자제하고 살인자를 용서하려고 찾아간 때. 뜻밖의 말을 듣는다. ‘제 죄를 고백하고 용서 받았습니다. 저는 평안합니다.’ 그때 여인은 혼란에 빠진다. 순간 모든 의미의 집이 무너진다. 피해 당사자인 내가 용서하기도 전에, 누가 먼저 너를 용서한단 말인가! 과연 ‘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 의사와 관계없이 너를 용서한단 말인가! 이 상황은 대체 무엇인가? 여인은 거의 실의에 쓰러진다.
과거 청산은 기억과 관계한다. 기억은 지나간 시간을 담는 그릇이다. 그런데 동은에게 시간은 온통 가해자들로 가득하다.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데 사라지지 않는다. 어떻게 자신을 괴롭히는 환영을 지울 수 있을까? 고상하게 표현하자면 과거 청산이다. 개인도, 사회도, 국가 단위의 거대공동체도 과거를 잘 정리해야 한다. 과거는 단순히 지나간 시간의 총합이 아니다. 그 안에는 기억이라는 생명체가 꿈틀거리고 있다. 이 기억이 자아와 잘 화해하면 문제가 없다. 그런데 이 기억과 자아가 화해되지 않으면 균형이 깨진다. 이 불협화음이 비극의 시원(始原)이 된다.
과거 청산이라는 인생의 숙제 앞에서 동은에게는 어떤 선택이 가능할까? 첫째 자포자기이다. 피해자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가해자 집단을 이길 수 없다. 동은이 경우 엄마까지 돈에 포섭되어 합의서를 써주고 말았다. 피해자에게 ‘너는 문제 없었니?’ ‘너만 조용하면 돼’라는 말은 이차 가해로서 더 큰 상처를 만든다. 피해자는 침묵과 무관심에 그냥 잊혀져갈 뿐이다. 모든 아픔을 속으로 삼키며 내적으로 병들어 시들어간다. (지금도 피해자 중에 이런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둘째 극단적 선택이다. 그것이 충분히 저항하지 못한 데 대한 자괴감에서 온 것이든, 가해자들에 대한 분노에서 온 것이든 겉으로는 구분이 안 간다. 피해자가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가는 경우다. 가해자는 어쩌면 속 시원하게 여기며 제 갈 길을 가고 말 것이다. 이 경우 피해자는 두 번 억울하게 된다. 셋째 그렇다면 복수하는 방법이다.
문동은식 복수 정의
동은의 경우 복수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자신에 대한 연민이다. 복수조차 하지 않으면 자신이 너무 불쌍하다. 몸과 영혼에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갖게 한 자들에게 복수하지 못한다면 내 존재가 너무 가련하다. 그래서 복수는 자신에 대한 필연적 보상이다. 다음으로 복수는 가해자들이 받아야 하는 인과응보이다. 폭력에는 폭력으로 갚아준다. 피해자가 베푸는 페어플레이다. 동은은 이 복수를 위해 고등학교 자퇴 이후 가해자들 앞에 나타나기까지 18년 동안 칼을 갈았다. 누구도 도와주지 못한 길을 홀로 견뎌야했다. 동은이 복수를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가해자들이 죄책감 없이 잘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사회적 불공평이다. 공정 사회라면 선한 사람이 보상 받고, 악한 자들이 징계를 받아야 하지 않는가! 신이 살아계시고 그 행위대로 심판하신다면 그런 인간들은 벌 받아야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 반대라니. 이는 견딜 수 없다. 무고한 피해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공의가 실현되려면 사회적 심판이 따라야 한다. 그런데 사회는 그런 데에 아무런 관심 없다는 듯 굴러간다. 동은은 개인적인 ‘저지드레드’가 되기로 한다.
‘문동은’ 앞에 예수님이라면?
누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혹 ‘너희 중에 가해하지 않았던 자가 있다면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을까? ‘문동은’은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위기의 순간에 ‘신’을 불렀는데 ‘그’는 도와주지 않았고 ‘나’는 상처 입고 말았다. 깊은 절망 속에서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복수 외에 그 어떤 것도 대안이 될 수 없었다. 동은은 생각한다. 이것은 최소한의 정당방위며, 내 파괴되어버린 생에 대한 보상이다. 복수는 원죄의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복수의 화신이 된 동은은 스스로 구원의 길에 들어서지 못한다. 그는 지옥 같은 실존에서 시지프스처럼 끊임없이 증오의 돌을 굴리며 복수의 산을 올라갈 것이다. 그 끝은 어디일까?
복수의 칼을 든 동은 앞에 예수께서 찾아오신다. 뭐라 말씀하실까?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 하셨을까? 아니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러면 동은은 과연 어떻게 하였을까? 예수님이 땅에 엎드리신다. 처절하게 상처입은 이 여인 앞에서 무엇이라 쓰셨을까?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신다. 동은이가 강도 만났을 때, 그 때 너희는 어디 있었느냐... 나는 동은이를 안고 먼저... 함께 상처 받았느니라. 상처난 내 손과 발을 보아라...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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