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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욱이의 생각

혼전순결을 지키지 못하면 걸레인가?

by 정직한 글쟁이 2023.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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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전 순결이라는 것은 결혼이라는 것이 하나의 기준점입니다.

현실의 교회나 성당에서는 나이 52살 플러스 청년부가 있습니다.

그분들이 청년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결혼 전이시고요.

결혼을 할지 말지 아직 결정한 바기 없기 때문입니다.

독신 주위인 건 아닌데 그냥 내 삶을 살다 보니까 그렇게 된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이 많은데 만약 그분들한테 혼전순결 지키셔야 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상황상 굉장히 불편한 상황일 수 있습니다.

 

왜냐면 52세 플러스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지금 이 얘기가 조심스럽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혼전 순결은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혼전으로 나누는 이 질문 자체가 유효성을 갖는 시절은 어떻게 말하면 지났다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혼전 순결을 강조하시는 분이 제일 많이 인용하는 게 모세법입니다.

근데 이 부분에 대해서 예수님은요 굉장히 무섭게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모세는 간음하는 것을 죄라고 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마다 다 간음한 자다.

즉 어떤 인간을 바라보더라도 전인격적으로 그를 바라보지 않고

그를 성적 대상으로 즉 음욕을 품고 바라봤다는 건

그 얘기거든요.

누군를 성적 대상으로 바라본다면 그 바라봄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따라서 저는 이 순결의 부분에 있어서 오히려 크리스찬이라면

훨씬 더 넓게 확장된 개념으로 순결 개념을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현대 사회의 많은 젊은이들이 결혼이라는 부분을 자기의 삶의 선택지로 여기지 않는 분들이 더 많습니다.

결혼이라는 것도 예전에는 그 한 25. 26세 점점 이게 이렇게 밀려 막 사십대까지도 가고 있는 이런 시점에서

인간의 어떤 성적 욕망이 가장 왕성하다는 20대, 30대를 다 혼전으로 통과하는 그런 구성원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혼전순결을 만약 즉 소위 말해 성관계의 어떤 직접적인 부분으로만 좁게 해석을 한다면 답을 하기도 애매하고 실제로 실천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요즘 제가 만나는 청년들이나 아니면 젊은 신앙인들과 이야기를 할 때

뭐 대놓고 질문을 하진 않지만, 대략 보면 혼전 순결을 지키지 못하고 온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이미 발생한 상황에서 신앙적 죄책감으로 오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두 가지 결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죄책감이라는 부분을 이야기할 때 과연 순결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한 번 일회에 발생하는 문제인가?

많이들 그렇게 생각하시는 데 특히 자매들이 그렇게 생각을 많이 합니다.

저는 이미 순결을 잃었어요.

 

 

실제로 어떤 크리스찬 지도자께서는 결혼 전까지 혼전 순결을 지켜야 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아름다운 선물이 포장된 건데 포장지를 먼저 뜯으면 안 된다.

이런 식의 표현까지도 하시던데 그러니까 마치 한 번 일회의 성관계가 포장지를 뜯어버리는 것처럼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말하자면 상품의 흠집을 내는 그런 방식의 접근을 그동안 많이 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일이 뭐 쌍방 합의 간에 발생을 했던 아니면 본인은 합의를 하지 않았던

그런 일이 한 번 발생하고 나면 아 나는 순결을 잃었어요.

나는 더 이상 혼전 순결을 지키는 거룩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에요.

이렇게 생각들을 많이 하신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1차로 대답드린다는 말씀이 그겁니다만,

과연 혼전성관계의 경험이 마치 선물 포장지처럼 일회로

나는 갑자기 더렵혀진 존재로 더 이상 순결하지 않은 존재가 되는 것이냐?입니다.

 

 

우리는 칭의론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는 혼전순결만이 아니라 모든 죄에 있어서 내가 한 번 저지르게 된 그 죄를 진심으로 자복하고 주 앞에서 하나님, 인간의 육신이 유한하여 이런 죄를 저질렀습니다라고 눈물로 회개하면

어떤 죄든지 사해주신다는 바로 그 신앙을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만약 그것이 다시는 그러고 싶지 않은 사람의 마음이라면, 그렇다면 너무 큰 마음의 짐을 갖지는 말아라!

충분히 하나님께 회개하고 기도하면 죄사함이라는 부분은 뭐 저한테 찾아올 것도 없이

그건 예수께서 이미 말씀하신 부분이니까 말입니다.

 

다만 그 질문의 핵심의 내용에 깔려 있는 내용은 저는 제가 생각하기로는 그렇습니다.

다시는 그렇게 안 하겠어요라는 메시지라기보다는

우리의 삶이 그렇고 그냥 이렇게 계속 살고 싶은데 이렇게 살아도 되나요?라는

일종의 허용을 요청?하는 에둘러 표현하는 메시지라는 생각이 저는 많이 듭니다.

 

왜냐하면 죄가 아니면 계속해도 된다는 식으로 생각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거죠.

그래서 저는 처음에는요 이 부분에 대해서 포착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는데

오히려 포착을 하고 난 다음에는 굉장히 근본적으로 접근을 합니다.

순결이란 무엇이냐 즉 혼전 순결에서 일단 혼전을 떼어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혼과 결부되지 않은 삶의 형태들이 지금 굉장히 많이 있는 이런 사회에서는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한 인간의 순결함이란 무엇이냐?

그거를 묻기 시작하는 건데요.

영적인 순결만이 아니라 이 몸에 있어서도요.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 앞에서 순결해야 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들과 내가 또 함께하는 이웃들 앞에서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하느냐?라는 걸 이야기할 때,

그것이 과연 어떤 특정한 부위의 문제이냐? 아니면 내 전 몸과 마음의 문제이냐

이런 부분들을 우리가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나하고 굉장히 근본적인 접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접근을 했을 때 많은 친구들이 저는 자유함을 느끼게 되는 경우들을 많이 봅니다.

 

이 자유함이란 이제 성관계해도 돼라는 자유함이 아니라,

내가 만약 지금까지 쾌락을 쫓았든 아니면 함께 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나를 더 사랑하지 않을 것이거나 관계가 단절될 것 같아서 두려웠던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하여 했던 자신의 행동들이 (성적 자기결정권 포함해서)

내가 과연 나의 존재 자체로 이걸 내가 인정하고서 정말 내 결단으로 임했던 건지?

아니면 그냥 나의 한 일부가 쾌락을 쫓아서 그 시대 문화를 따라서 요즘엔 다 그래~ 이런 방식으로

의 어떤 파편의 생활만을 음행화해서 즐긴 건지?에 대한 부분들을 한 번 성찰해보자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 부분을 생각하면서 자유로워하는 친구들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21세기 요즘 문화를 브라이언 터너라는 학자가 육체 문화라고 불렀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육체 문화라는 거예요.

인간이 몸이 할 수 있는 사회학적 기능, 즉 혼자가 아니라요. 여럿이 하는 기능 중에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생산 노동 그렇죠 뭐 땅 밭 갈고 뭐 이렇게 나무 패고 하는 생산 노동

둘째는 재생산 이것도 노동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출산을 의미합니다.

근데 21세기 사회는 이 두 가지가 굉장히 압도적으로 줄어든 사회라는 거예요.

끝으로 세번째가 바로 성노동입니다.

그러니까 성에 사용하는 몸이라고 해야 되겠죠?

그래서 인간이 몸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많은 사회적 기능 중에서

성적인 관계에 해당하는 부분만이 확대된 사회가 소위 말하는 21세기의 사회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이 사회를 육체사회라고 육체 문화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이런 문화 속에서 우리가 순결을 굉장히 좁게 생각하고 혼전에만 지키면 돼.

그리고 이 사람이랑 결혼하면 돼. 그러니까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굉장히 좁게 접근을 한다면

어떻게 말하면 정말 전인격적인 나의 존재를 파편화하고 대상화하고 분절하고

어떤 일부만을 적용하는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거야말로 저는 그 순결함이라는 걸 놓고 봤을 때

부정적인 대답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확신합니다.

 

보통 이 순결에 대해서 특히 혼전 순결을 강조하시는 분이 제일 많이 인용하는 게 모세법이에요.

남녀가 결혼을 하지 않고서 만약에 행음을 했다면 그 여자가 처녀일 경우에는요

그 여자의 아버지에게 일정한 분량의 돈을 물어주게 돼 있어요.

그야말로 선물 포장지 뜯은 값이죠.

그리고 그 여자랑 결혼을 해야 돼요.

 왜냐하면 이미 그 여자는 처녀의 순결함을 잃었다고 간주가 되기 때문에

그래서 페널티를 내고 결혼을 해야 되는 상황이 되는 거고요.

그다음에 그 행음한 자가 유부녀일 경우에는 그렇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남의 아내를 탐한게 되는 거잖아요.

그걸 현장에서 들키면 둘 다 돌 맞아 죽는 굉장히 치명적인 죄악이 되는 거죠.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예수님은 굉장히 무섭게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요 뭐 살인, 간음 이런 어떤 굉장히 모세 율법에서 이렇게 치명적으로 형벌을 내려야 된다고 이야기하는 그 조목조목, 뭐 이혼도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항목들을 얘기하시는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냐?

심지어 모세는 간음하는 것을 죄라고 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마다 다 간음한 자다.

 혼전 순결을 잃었다 = 간음.

사실 성경이 얘기하는 간음은 결혼 외의 성관계예요.

 근데 예수님도 바로 그 단어 간음이라는 단어를 쓰신 건데 따라서 그것은 혼전 순결만이 아니라 혼후도 포함하고요.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더 무시무시하죠.

손으로 범죄했다면 손 잘라버려라, 눈으로 범죄했다면 눈을 빼버려라.

 이렇게 얘기할 정도로 아주 어마어마하게 한 인간을 저는 여기서 여자를 인간으로 번역하고 싶은 이유가

그 당시에는 남자들이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훨씬 더 성적 대상화가 되어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를 여자라고 표현했다고 생각하는데 오늘날에는 이를 남자를 향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즉 어떤 인간을 바라보더라도 전인격적으로 그를 바라보지 않고

그를 성적 대상으로 즉 음욕을 품고 바라봤다는 건 그 얘기에 해당합니다.

 

다시 말해, 성별을 떠나 누군가 성적 대상으로 바라본다면

그 바라봄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 순결의 부분에 있어서 오히려 크리스찬이라면

훨씬 더 넓게 확장된 개념으로 순결 개념을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치 가부장제 안에서 재생산에 관련해서 출산을 할 때

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여성의 성을 통제했던 방식으로서의 혼전 순결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은 그거보다 더 훨씬 넓어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굉장히 지키기 어려운, 어떻게 말하면 굉장히 혁명적인 인간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입니다.

 

그 가부장제 한중간을 사셨던 예수님께서 모세법을 언급하시면서

그러나라고 아주 멋지게 그 반대로 이야기를 해주시면서 어떤 사람이라도 여자를 음욕의 눈으로 보지 마라!

전 오히려 그것이 가장 성경적인 대답이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조심스럽습니다만 요즘 같은 시절에 만약에 솔직히 둘이서 제도로서의 결혼을 하지 않고,

둘이 Corresponding 파트너(ex : 프랑스의 동거문화) 즉 상응하는 돕는 자로서 계속 살아가는 다른 방식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다 해도 사실 지금 서구 유럽권에서는 Civil 유니언이라고 해서 시민연대라는 방식으로 실험적인 것들이 많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걸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자라는 내용이 아니라 즉 제가 그래서 아까

혼전이라는 부분을 놓고서 여기다만 초점을 두면 답을 하기 어렵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즉 결혼이라는 그 제도에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순결이라는 이 부분에 초점을 두어서

내가 헌신하기로 결단하는 사랑하는 너에게

정말 나의 몸과 마음과 온 진심과 나의 에너지와 모든 것들을

분절적으로가 아니라 아주 온통 통전적으로 주고 있느냐 이 부분을 만약에 순결로 해석한다면,

저는 이것은 일회적이지도 않고요. 누가 빼앗아가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즉, 굉장히 상호적이고 관계적인 개념입니다.

다시 말해, 법적으로 죄나 이건 몇 년 형, 이런 부분이 아니라 함께 관계 안에서 조정하고 건설해 가야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산상 속에서 그 부분을 지적하신 거라고 생각해요.

예수님 말씀의 초점은 눈 빼, 팔 잘라, 손 잘라 이 말이 아니라 그만큼의 치명적인 결단으로 한 인간을 바라볼 때에 통전적으로 바라봐라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도고하지 말아라 이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런 광의의 의미를 적용할 때 우리는 더 순결함을 지키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건 정말 꼰대의, 선생의, 어떤 아비의 우려일 수도 있는데요.

 

특히나 이제 십 대 후반이나 이십대 초반에 이제 한창 열정적인 친구들이 이런 질문을 할 때 전 하나 덧붙이는 것이

사람은 그 관계가 서로 접혀 있었던 그 밀도와 기간만큼 서로가 헤어지게 되거나 등 돌리게 되었을 때 상처가 훨씬 깊다.

그 얘기를 하거든요. 그 관계가 접혀 있다는 표현은 그렇죠!

왜 데이트 하다가 손 한 번 잡으래도 얼마나 두근두근 언제 잡아야 되지? 뭐 어떻게 잡아야 되지?

이런 결정 그거 때문에 막 힘들어 하고요.

그 다음에 왜 대부분의 첫 키스는 여자친구네 집 대문 앞일까요?

왜냐하면 계속해서 주저주저, 마지막까지 살핀 거거든요. 괜찮을까?

그러니까 바로 그런 설레임들이 사실은 하나하나 쌓여서 관계가 만들어지는 거고

그리고 그 관계들이 결혼으로 이어졌을 때 우리의 그 연합을 훨씬 더 깊게 하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또 헤어지게 되었을 때도 그만큼의 깊이만큼 아픔이 남는 거잖아요.

 

근데 이런 어떤 성적인 결합은

관계에 있어서 가장 서로의 경계가 가장 가깝게 겹치는 인간이 나의 바운더리를

온전히 너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밀접한 관계라고 생각을 합니다.

근데 이 부분은 그야말로 엄청난 큰 흔적을 남겨요.

이는 죄의 흔적이 아니라 그러니까 너의 상실 내지는 어떤 관계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갔을 때

나에게도 너에게도 남기는 상처들이 정말 크다는 이야기를 저는 꼭 어린 친구들한테는 해즙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문화 속에서 남들 다 그래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제가 마태복음 5장을 무섭지만 항상 친구들한테 들이밉니다.

그러면서 어떤 방식으로라도 그 친구를 전인격적으로 바라봐 주어라. 그리고 나의 전인격으로 또 그렇게 다가가라. 그게 사랑의 기본 조건이고 그게 순결의 조건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렇게 바라본다면 오히려 이 부분은 더 어렵게 어떤 면에선 더 지키기 어려운 그런 순결이 아닐까 생각을 하구요.

또 그러다가 어쩌다가 넘어진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도 충분히 죄로 두려워 떠는 것이 아니라

늘 용서해 주시고 품어주시고 용납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얼마든지

관계를 다시 재설정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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