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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0분 인문학

정주영 회장의 어록(명언) 및 일화

by 정직한 글쟁이 2023.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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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기업인)

 

출생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사망

2001년 3월 21일

 

가족

배우자 : 변중석

아들 : 정몽필, 정몽구, 정몽근, 정몽우, 정몽헌, 정몽준, 정몽윤, 정몽일

 

학력

: 통천송전소학교

 

경력

: 2006년 11월 타임지 선정 아시아의 영웅

1998.3~2001.04 현대건설 대표이사 명예회장

 

 

매일이 새로워야 한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다."

 

 

정주영 회장의 어록 16가지 (정주영 명언)

 

1. 운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운이 나빠지는 거야

 

2. 길을 모르면 길을 찾고, 길이 없으면 길을 닦아야지

 

3. 무슨 일이든 확신 90%와 자신감 10%로 밀고 나가는 거야.

 

4. 사업은 망해도 괜찮아. 신용을 잃으면 그걸로 끝이야.

 

5. 나는 젊었을 때부터 새벽에 일어났어 더 많이 일하고

 

6. 나는 그저 부유한 노동자에 불과해

 

7. 위대한 사회는 평등한 사회야. 노동자를 무시하면 안돼

 

8. 고정관념이 멍청이를 만드는 거야.

 

9. 성패는 일하는 사람의 자세에 달린거야.

 

10. 아무라도 신념에 노력을 더하면 뭐든지 해낼 수 있는 거야.

 

11. 내 이름으로 일하면 책임 전가 못하지.

 

12. 잘 먹고 잘 살려고 태어난 게 아니야. 좋은 일을 해야지.

 

13. 더 바쁠수록 더 일할수록 더 힘이 나는 것은 하나님이 내린 축복인가봐

 

14. 열심히 아끼고 모으면 큰 부자는 몰라도 작은 부자는 누구나 될 수 있어.

 

15. 불가능하다고? 해보긴 했어?

 

16. 시련이지 실패가 아니야.

 

 

 

 


정주영 어록

 

최고의 마인드를 가진

아시아 최고의 영웅 정주영

 

누구도

안 될 것이라고 했지만 해봤나?

 

명언을 남기고 대한의 국민들에게 불가능을 가능으로 실전한 장본인

 

 

자기 자신의 실패는 가슴깊이 새겨 두어야 한다.
실패를 망각하는 사람은 또 다른 실패가 있을 뿐이다.

정주영 어록 중에서



 

재계의 거인 정주영 전 명예회장 만큼 많은 일화를 뿌리고 다닌 인물도 드물다.

 

소학교 졸업의 학력에

맨손으로 출발해

우리나라 근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현대그룹을 이끌었기에

그의 주변에는 많은 에피소드가 항상 따라 다녔다.

 

 

정주영 회장은 소설 「흙」을 읽으며 변호사를 꿈꿨다.

소년 정주영이 16세때 고향 통천을 떠나는 계기가 됐던 것은

당시 모 신문에서 연재한 이광수의 소설 「흙」때문이었다고 한다.

정주영은 이 소설을 읽기위해

당시 해당신문을 구독하고 있던 마을 이장 집으로

밤마다 2㎞ 이상을 달렸다고 한다.

 

 

소년 정주영은 이 소설을 읽으며

도시생활을 꿈꿨고 주인공처럼 변호사가 되기 위해 가출했다.

실제로 상경한후 정주영은 `법제통신(法制通信)' 등

여러 법학 관련서적을 독학한 적도 있다고 한다.

 


 

더욱이 정주영은 '빈대'로부터도 교훈을 얻는다.

네번째 가출로 인천부두에서 막노동을 하던 때,

청년 정주영이 머물던 노동자 합숙소는 `빈대'로 들끓었다.

 

정주영은 어느날 빈대에 물리지 않을 꾀를 내

탁자위에서 잠을 잤다.

 

잠시는 괜찮았다.

그러나 빈대가 탁자 다리로 기어올라와

물어뜯기 시작하는 것 아닌가?

 

정주영은 꾀를 냈다.

탁자다리 네개를 물담은 양재기 넷에 하나씩 담가놓고 잠을 잤다.

빈대가 탁자 다리를 타고 올라가다 양재기 물에 떨어져 익사하게 하자는 묘안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빈대들이었다.

빈대들은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간 다음 사람을 목표로 뚝 떨어져 목적을 달성했다.

그때 정회장은 하찮은 빈대도

물이 담긴 양재기라는 장애를 뛰어넘으려

그토록 전심전력으로 노력하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최선을 다하면 무엇을 못하겠느냐는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유엔군 묘지에 보리물결 52년 12월 미국 아이젠하워가 한국을 와 부산에 있는 유엔군 묘지를 방문하려했다.

미군측은 당시 엄동설한에 정주영 회장에게 묘지를 파란잔디로 단장해달라는 황당한 주문을 했다.

 

`12월 한겨울에 파란잔디라?'.

 

그러나 정 회장에겐 불가능이 없었다.

"풀만 파랗게 나 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뒤,

정 회장은 보리밭에서 새파랗게 자라는 보리를 수십트럭 옮겨 심어 묘지를 녹색바다로 만들었다.

미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이후 미 8군 공사는 정주영의 것이었다.

 


 

500원 짜리 지폐와 초라한 백사장 사진의 현대중공업 신화

현대조선소를 설립할 당시

정주영 회장에게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다.

 

정 회장은 71년 9월 영국 버클레이 은행으로부터

차관을 얻기위해 런던으로 날아가

A&P 애플도어의 롱바톰 회장을 만났다.

조선소 설립경험도 없고,

선주도 나타나지 않은 상황에서 영국은행의 대답은 한마디로 `NO'였다.

 

그러나 정회장은 간단히 물러서지 않았다.

 

갑자기 바지주머니에서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펴 보였다.

 

"이 돈을 보시오. 이것이 거북선이오.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전인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소.

단지 쇄국정책으로 산업화가 늦었을 뿐, 그 잠재력은 그대로 갖고 있소" 

 

정주영은 다음과 같은 임기응변으로

롱바톰 회장을 감동시켜 차관에 대한 합의를 얻었다.

 

하지만 선주를 찾는 일이 문제였다.

그때 정주영의 손에는 황량한 바닷가에 소나무 몇그루와 초가집 몇 채가 선 초라한 백사장을 찍은 사진이 전부였다.

정회장은 이같은 광경이 담긴 미포만 사진 한장을 쥐고 미친듯이 배를 팔러 다녔다.

결국 정주영은 그리스 거물 해운업자 리바노스를 만나 26만t짜리 배 두척을 주문받았고

조선소 건립과 동시에 2척의 배를 진수시킨 세계 조선사에 유일한 기록을 남겼다.

 

이렇게 설립된 현대조선소는 현재 세계 최대 규모의 중공업회사로 성장했다.

 


 

끝으로 올림픽 유치와 꽃 바구니 한국과 일본이 올림픽 유치전을 벌일 당시

한국이 유치에 성공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올림픽 유치위원장이었던 정 회장은 현대의 해외 파견직원들을 동원해

IOC 위원들에 대한 세밀한 신상 파악으로 성향을 분석하고

경쟁유치국의 활동상황까지 치밀하게 분석했다.

 

그중 압권은 `꽃바구니 전략'.

정회장은 한국의 IOC 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꽃바구니 하나씩을 각국 IOC위원 방에 넣어 주었다.

그 꽃바구니는 단순히 주문된 것이 아니라 현대의 해외파견직원 부인들이 정성스럽게 하나하나 만든 것이었다.

꽃바구니의 반응은 의외로 대단했다.

그 다음날 각국 IOC위원들이 회의를 끝내고 로비에 모였다가 한국 대표단을 보면

모두 반가워하며 아름다운 꽃을 보내줘 감사하다는 인사를 진심으로 전했다.

 

 

반면 최고급 일본 손목시계를 선물했던 일본에는

감사인사가 없었던 점으로 볼때

역시 값비싼 선물보다는 마음과 정성이 담긴 작은 선물이 인간적인 따스함을 전달하고

부담도 안주었던 것 같다는 게 당시 올림픽 유치단의 생각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각국 IOC 위원들의 반응은 상당히 호의적으로 변했고

그간 정주영과 현대 임원들이 펼친 유치활동은 성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결국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쎄울 코리아"를 외치면서 한국과 일본의 올림픽유치전은 우리측의 승리로 끝났다.

 


 

소떼몰이 방북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정 회장은 소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유년시절 정주영 가(家)에서 소는 생계의 밑천이요, 가족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정주영은 어린시절 가난이 싫어 소판 돈을 갖고 무작정 상경했다.

그후 노동판의 막일꾼에서세계적인 기업가로 성공하기까지

정 회장은 묵묵히 일 잘하고 참을성 있는 소를

성실과 부지런함의 상징으로 삼고 인생을 걸어왔다고 한다.

 


자기 자신의 실패는

가슴 깊이 새겨두어야 한다.

 

실패를 망각하는 사람은

또 다른 실패가 있을 뿐이다.

 

- 정주영 어록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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