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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욱이의 생각

어거스틴의 인간이해

by 정직한 글쟁이 2024.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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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의 인간이해

본 통찰은 이신형 교수님의 과목 "고대기독교사상사"를 수강한 윤경자님의 글임을 밝힙니다.

 

I. 서론

 

초기의 Augusitne은 그의 독백록(Soliloquia)에서 자신은 하나님과 영혼 이외에 다른 것을 알고자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후기에 갈수록 교회봉사와 성서연구 덕분으로 신플라톤적인 색체는 거의 없어지고, 죄와 은총의 새로운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 '하나님과 나의 영혼'에 대한 관심이 '교회', '구원', '역사' 등의 관심으로 확대된다. 여기서는 그의 인간이해가 그의 사상적 발전을 어떻게 이끌어갔는지에 대하여만 한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II. 본론

 

1. Augusitne의 사상적 특징

Augusitne의 사상은 한 마디로 말하면, 행복론(eudaemonism) 즉 행복(beata vita)의 추구로 시작하고 채색되어 있다. 그의 철학에 대한 관심은 단순한 이론적 체계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고 실존적인 관심으로서 자기 혼의 안정과 행복을 이룩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는 철학, 신학, 종교가 전부 하나로 묶여져 결국 인간 행복의 성취를 위한 실존적인 관심 영역으로 들어오고 만다.

 

1) 그러면 어떻게 행복을 찾을 수 있는가?

어거스틴은 진리의 추구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필요조건이며, 그 진리의 소유가 바로 행복의 달성이라고 주장한다. 진리와 행복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고, 이 둘이 합해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이룩한다고 본다. 그에게 있어서 진리(veritas)는 하나님 자체이며, 항상 불변하고 영원한 것이다. 반면 모든 피조물은 시간적이고 가변적이기 때문에 인간은 피조물에서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없다.

 

2) 그러면 진리를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그에 의하면 이 진리를 소유하고 인지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마음 밖에서 찾지 말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 인간의 내면(homo interior)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성 혹은 내적 인간이란 영원한 진리와 접촉을 가질 수 있는 연결점으로, 진리가 인간의 마음에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간의 마음을 통해서 초월적 진리이신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다. 인간은 시간과 변화로 인해 제한되어 있어 불안정한 존재이지만 영원한 진리가 되신 하나님께(ad Deum) 마음이 열려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내적 인간을 통해서 우리가 영원한 진리가 되신 하나님을 바라고, 인지하고, 소유하게 될 때 우리 인간은 비로소 행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Augusitne에 의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도 행복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존재란 어떤 철학적인 개념이나 원리가 아니라 우리 존재가 그에게 의지하고, 그 안에서 살며, 그를 소유함으로써 행복하게 되는 살아계신 실체이시다. 또한 그에게 있어 철학이 추구하는 대상 역시-진리, 즉 하나님의 존재, 영원성, 불변성 만이 아니라, 인간이 욕구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지고선(summum bonum)도 그 대상이다.

 

3) 그러면 진리 안에서 지고선을 소유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Augusitne에 의하면 하나님은 곧 진리자체, 존재의 근원, 지고선이시기에 지고선을 소유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바라고 그를 소유한다는 뜻이며, 여기서 소유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의 대상을 소유하고자 하며, 그 대상을 소유함으로써 행복을 느낀다. 즉 인간은 사랑을 통해서 지고선이시며 영원자인 하나님을 소유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Augusitne의 신 중심사상(theocentricism)은 그의 존재론, 행복론 뿐 아니라, 지식론에서도 신의 조명(divine illumination)으로 설명하고 있다.

 

4) 그러면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소유함으로써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이 실제로 가능한 문제인가?

그의 태도는 소극적이다. 희랍철학이 내세우는 하나님에게로의 상승의 길 즉 에로스의 길은 인간의 피조성과 죄 때문에 막혀져 있고 다만 남아있는 길은 하나님으로부터의 길 즉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피조물이요 죄인인 인간을 찾아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소유하도록 하는 길 뿐이다. 여기서 그의 기독교 신앙 이해의 핵심이 있다. 인간의 혼이 비록 하나님에게로(ad Deum), 진리와 지고선에로 열려져 있다고 할지라도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피조물과 창조자, 유한자와 무한자, 시간과 영원과의 관계 밖에 되지 않는다. 이점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개념은 인간의 시간성에 대한 문제 해답에 필요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왜냐하면 다만 하나님의 은혜만이 시간과 영원 사이 즉 역사적으로 죄인인 인간과 영원히 신실하신 하나님과의 사이에 있는 간격을 메울 수 있기 때문이다.

 

 

 2. Augusitne의 영혼에 대한 이해

 

1) 영혼의 본질

 

"나는 신과 영혼을 알기 원한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느냐고? 그럼, 아무것도 원치 않는다."

(독백록 1권 2장 7절)

 

그의 주된 관심은 영혼에 관한 것이다. 그가 영혼을 다루는 방법, 내면적인 관찰, 영혼 활동을 기술하고 분석하는 재간, 마음을 다바쳐 이해하는 것 등등은 Augusitne이 드물게 심리학적 재능을 가진 자임을 알 수 있지만, 그가 심리학적인 것에만 머물지 않고 철학적 문제에도 마음을 기울임을 볼 수 있다.

 

① 영혼은 비물질적인 것이다 : Augusitne은 영혼과 물질세계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강조한다. "영혼이 하나님의 본질은 아니지만, 영적인 것-육체가 아니라 정신이라는 방식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것 이외에는 영혼에 대하여 어떤 확신도 할 수 없다."라는 말 속에 분명히 나타난다. 영혼의 고귀성(신성성, spirituality)을 진술하는 이 점에서 그는 플라톤의 개념들을 빌리고 있다.

 

② 영혼은 하나의 실체이다 : 영혼을 다룸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은 영혼이 정말로 하나의 실체라는 것이다. 그는 영혼이 실체라고 하는 것을 자아의식을 분석함으로써 근거지우는데, 이 분석은 자아가 실제로 있다는 것(실재성), 자아가 독립해 있다는 것(자존성), 자아가 계속해서 있다는(지속성) 세 가지 점으로 밝혀낸다.

 

③ 영혼은 불멸한다 : {독백록} 제 2권과 {영혼의 불멸에 대하여}에서 그의 영혼의 불멸에 관한 증명의 기본사상은 다음과 같다. "진리가 변치 않고 영원하며 인간의 정신이 진리와 떨어질 수 없게 결합되어 있는 이상 인간의 정신도 영원할 수 밖에 없다."

 

2) 육체와 영혼의 통합(Union of body and soul) : 인간의 본질(Nature of man)

 

① 육체와 영혼의 통합성 : Augusitne에 있어 인간은 천사나 짐승이 아니라 혼합없이 하나를 이루는 복합된 본질로 나타나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이다. 그는 무엇보다 영혼을 감옥, 도구로써의 몸을 가진 전인으로서 간주하는 플라톤적, 오리겐주의적 이분법을 거부한다.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육체, 지상적인 육체를 다스리는 이성적인 영혼이다." "인간은 영혼과 몸으로 이루어진 이성적인 실체이다." 그에게 있어 육체는 더 이상 인간에게 낯선 것이 아니며, 그것은 인간 자체이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다.

 

② 육체에 대한 이해 : 더 나아가 마니교와 신플라톤주의에 반대하여 육체의 가치를 주장함으로써 육체의 선함의 위치를 회복시켰다. 육체는 그 자체로 선하며, 육체와 통일되는 하나가 되는 영혼은 영적인 영혼(spiritual soul)이다. 그는 마니교도들의 두 영혼-선한 영(good spirit)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악하고 동물적인 영혼(the evil and soul)은 어두움의 영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거부하며, 3분설 이론도 비난하며, 단지 인간 안에 오직 두 요소-육체와 영혼(body and soul)만 인정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때때로 soul과 spirit 간에 차이를 보여줌으로 인해, Augusitne의 인간의 완전한 본성은 spirit, soul, body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은 생각하고(spirit), 육체를 움직이고(soul), 모든 심리적 현상의 원리(body)가 되는 하나의 단일체이다. 더구나 이 결합은 너무 본질적(친밀하고, intimate)이고 심오하여서 영적인 영혼은(spiritual soul) 육체에 감각적이고, 식물적인 생명을 부여할 뿐 아니라 몸의 육체적 실재(corporeal subsistence)와 존재(being)를 부여한다. 그러므로 육체는 영혼을 통하여 유지되며, 육체가 움직이게 된다는 그 사실에 의해서 존재한다. 영혼은 육체가 유지되는 한, 육체이기 위한 형태(form)를 주는 것이다.

 

3) 영혼의 기원(The origin of soul)

Augusitne의 영혼의 기원에 대해 좀 더 잘 이해하려면, 아주 상이한 두 가지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는 출생에 의해서 태어날 수 없었다는 아담과 이브의 영혼의 기원에 관한 것이며, 둘째는 그들 후손의 영혼의 기원에 관한 것이다.

 

① 결정적인 결론

영혼은 거룩한 실체로부터 나올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인간들이 경험하는 변화와 더불어 인간 영혼의 모든 부분의 타락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불변성, 단순성, 거룩성에 반대되는 신성모독이 되기 때문이다. 영혼, 심지어 아담과 이브의 영혼들 조도 우주의 자연적인 진화로부터 혹은 육체적인 배자(seed)로 부터, 거룩한 중재를 가진 어떤 동물의 영혼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의 거룩성은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영혼은 육체적 존재 혹은 비이성적인 동물이 그의 본성으로 바뀌어진 방식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Augusitne이 선호했던 영혼유전설(traducianism, 전이설)은 전적으로 영적이었다. 전이설은 영혼이 그의 부모의 영혼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에서, 영혼의 비물질성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인격성을 제거하는데 그 위험이 있다. 그는 영혼의 윤회설(metempsychosis, 영혼이 다른 인간의 몸이나 심지어 동물에게 전이됨)은 더욱 반대한다. 아담의 영혼뿐 아니라, 그 자손들의 영혼들도 첫째날에 창조된 비물질적인 실체들로 나올 수 없다.

하나님은 미래 존재들의 배자를 우주가운데 뿌리심으로써 만물을 창조했다고 확신한 Augusitne은 "아담의 영혼이 우주의 물질들과 함께 우연하게 창조되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며, Literal commentary on genesis 7권에서 다음의 3가지 가능한 가설에 반대한다.

a. 첫번째 가설 : 씨같은 원리가 아담의 육체에 대하여 말하여지는 때인 바라는 시간에 영혼안으로 편쳐진다는 것이다. 이 가설의 어려움은 이 영혼의 배자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b. 두번째 가설 : 하나님께서 태초에 비물질적인 실체로써 시간의 과정속에 모든 인간의 영혼을 형성하셨다는 것이다. 이 가설의 어려움은 "어떻게 이 비물질적인 실체가 활동적이며, 지적이며, 행복하거나, 불행하게 될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c. 마지막 가설 : 하나님께서 천사 안에 영혼들의 씨같은 원리들을 배치해두셨다는 것이다. 부모들이 우리 육체의 본질을 제공하셨듯이, 천사들이 우리 영혼의 본질을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영혼을 천사들의 아들들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모든 의혹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이 아담의 영혼을 직접적으로 세계창조 첫 날에, 혹은 첫 사람의 몸에 영혼이 하나가 되는 순간에 창조되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② 아담자녀들의 영혼의 기원 : 해답이 없다.

a. 만약 영혼들이 부모의 영혼들의 전달로부터 나온다면, 어떻게 인격체가 보호될 수 있는가?

b. 만약 영혼들이 창조되었다면, 원죄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Augusitne은 이런 비판과 함께 영혼들이 창조되었다는 가설위에 3가지 체계들을 구분하였다.

a. 첫째 : 영혼들이 육체와 연합되는 그 순간에 창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곱째날 하나님의 안식일을 철폐해 버렸을 것이다.

b. 둘째 : 영혼들이 세상창조와 함께 창조될 수 있다는 것이다.

c. 셋째 : 연이어서 육체와 연합해야될 운명에 있는 영혼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혹은 그들 스스로 육체와 연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두 경우는 기다림의 오랜 세기동안 영혼들이 어떤 종류의 존재와 행동양상을 가지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성경에는 이 문제를 만족시킬만한 결정적인 본문이 없다.

 

이 문제에 대하여 Augustine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I do not dare to teach what I do not know."

 

 

 3. Augustine 인간 이해에 따른 교리발전

Augustine의 영혼과 본질에 대한 이해는 죄, 구원, 은총, 예정이라는 기독교의 교리로 발전하게 된다. 특히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은 초기의 마니교,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 기독교 교리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여기서 그의 인간이해에 따른 교리를 살펴보기 전에 동방, 서방 기독교 교회의 인간론과 구원론의 차이점을 언급한 후, 펠라기우스 논쟁을 중심으로 그의 인간이해에 관련된 교리들을 살펴 보겠다.

 

1) 동, 서방교회의 인간론과 구원론의 차이점

동방기독교가 니케아와 칼케돈 공의회에서 각각 삼위일체론과 양성론의 기독론을 교리화 하는 동안 서방교회는 죄와 은총론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동방과 서방교회 사이에 이 문제로 인한 뚜렷한 차이는 3세기 이후에야 나타나기 시작한다.

 

동방교회 : 동방교회는 비교적 낙관적인 인간이해(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강조)에 근거하여 신인협력(synergeia)을 통한 신성화를 구원으로 생각한다. 동방교회의 인간론에서 중요한 것은 이레네우스에서 처음 이루어진 하나님의 형상(image)과 모양(likeness)의 구별이다. 여기서 "형상"은 인간을 하나의 인격으로 만드는 인간의 자유, 의지, 이성, 도덕적 책임성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고, "모蒷"은 처음부터 주어진 형상과 달리 점차 단계적으로만 획득할 수 있는 목표를 지칭한다. 이것은 아담이 순전하고 단순한 상태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아담을 완전한 이해력을 가지지 않은 어린 아이의 상태로 여기는데, 이것은 타락의 결과도 그리 심각하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타락의 결과 하나님의 "모양"은 상실되었으나 "형상"이 -왜곡되기는 했어도-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는 것이 동방교회의 설명이다. 동방교회는 이에 기초하여 은총과 자유 의지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하여 신인협력(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특별한 은총없이 하나螱의 전체구원 역사를 은총으로 이해하였다. 오직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구원의 본질을 신성화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전체 구원의 역사는 인간의 신화를 목표로 하는 하나의 웅장한 교육과정이며, 이것은 인간에게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죄악의 부패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을 의미한다. 아타나시우스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목표가 인류 안의 신성을 회복하는 것이라 하였다.

 

② 서방교회 : 동방교회와는 달리 인간본성의 타락으로 인한 비관적인 인간이해에 근거하여 원죄 교리의 발전과 하나님 은총의 필요성이 강조되었고, 우주적 차원이 아닌 실존적이고 윤리적인 새로운 구원론이 전개된다. 특히 Augustine에 와서는 논란이 많았던 예정론으로까지 발전한다.

최초로 원죄에 대하여 가르친 이는 터툴리안이다. 그는 선재설, 창조설을 모두 거부하고 영혼유전설(전이설)을 내세움으로써 아담이 하나님께로부터 참된 인간적 본성을 받았지만, 아담이 후손들에게 물려준 본성은 죄의 성향으로 손상당했으며, 비이성적 요소가 영혼속에 접착하였다고 말한다. 영혼의 죄된 상태는 아담과의 곤계에서 생긴 결과로 생각함으로써, 그는 유전 죄를 인정하는 길을 마련하였다. 서방 교부들의 진정한 죄됨의 강조는 동시에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는 것으로 연관된다. 시프리안은 어린이에게도 죄가 있으며 따라서 신생을 필요로 한다는 근거에 입각하여 유아세례를 옹호하였다. 또한 힐러리는 인간의 자연적 타락의 보편성을 강조하였고 하나님의 은총을 인간의 모든 공적이 되는 행위보다 선행하는 것으로 인정하였다. 특히 암브로스는 죄를 일종의 전염병으로 간주하여 오염의 근원을 잉태에 까지 소급시켰으며, 이것은 용서받지 않으면 안되는 죄라고 묘사하였다. 인간의 의지의 전환을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로 지적한 것도 그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동서방 간의 차이가 아직 분쟁을 야기시킬 정도는 아니였던 것은 동방교회는 인간의 죄된 상태의 보편성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필요성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으며, 서방교회는 인간이 개인적 책임과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2)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통한 Augustine 교리발전

3세기부터 인간과 인간구원이라는 주제에 관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사이에 뚜렷한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하며, 특히 서방교회가 죄와 은총의 문제와 하나님의 올바른 관계에 관심을 집중하게 된 것은 물론 Augustine를 통한 펠라기우스와의 논쟁 때문이었다. 이 논쟁을 통하여 초기에 마니교의 주장에 대항하여 인간의 자유를 옹호하였던 그의 입장이 인간 스스로는 의지를 변화시킬 수 없고 하나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는 입장으로 발전된다.

 

① 펠라기우스의 가르침

a. 죄와 의지의 자유 : 펠라기우스의 기본적 관심은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성취할 인간 본성의 능력이 있다고 봄으로써, 인간 본성에 대하여 낙관적 신뢰를 가진다.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죄로부터 돌아설 수 螶는데 이때 3가지 기능이 작용한다고 본다. '능력'(posse)에 의해서 실제로 의롭게 될 수 있고, '의욕'(velle)에 의해서 의롭게되려고 마음 먹으며, '행동'(esse)에 의해서 실제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능력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나, 의욕과 행동은 우리 자신의 것이고 우리에게서 생기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결론이 도출되는데 죄의 본성은 상태나 '성향'이 아니라 개별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타락도 유전이 아니라 아담의 악한 사례를 모방한 것이라 하여 인류의 타락을 모방으로 설명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완전한 삶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미 본성의 선은 이교도들로 하여금 최고의 덕성을 발전시킬 수 있게 하였으며, 그에게 있어 인간이 죄된 생활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개념은 원죄의 교리, 혹은 대대로 전달되는 죄된 성향에 관한 가르침을 배격한다. 아담의 타락은 그의 후손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행위이며, 죄의 유전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무죄한 유아들에게 유아세계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b. 죄의 필요성 : 인간의 감각적 성질은 그 자체로서는 무죄한 것이지만, 시험과 범죄의 기회가 된다. 악한 선례들이 개개인의 범죄의 기회가 되며, 면면히 계속되는 죄성을 통해 그 힘을 가지고 있다(범죄의 필연성을 인정).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개개인의 행위를 넘어선 전체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기에 죄의 보편성을 진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c. 은총 : 진정한 의미의 은총에 대하여 믿지 않았다. 즉 그는 은총을 인간속에 있는 하나님의 세력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능력에 미치는 하나님의 창조적 세력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에게 있어 은총은 인간의 이성을 개발시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하며, 자신의 능력으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는 단지 인간 의지의 바른 행위를 돕는 힘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편에서 요구되는 것은 그러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태도를 갖추는 일이다.

d. 구원의 본질 : 펠라기우스에게 있어 구원의 본질은 자유 의지를 사용하여 주의 계명을 지키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름으로써 의로운 행위를 하는 것이다. 칭의 역시 율법을 실행하여 의로운 행위를 하는 자들을 의롭다하는 '행위의 의'에 불과한 것이다.

 

② Augustine의 가르침

a. 죄와 의지의 자유 : Augustine에서 죄는 펠라기우스처럼 계명에 대한 단순한 불순종의 '행위'가 아니라 방향이 잘못 잡힌 인간 '본성'의 문제였다. 로마서 5장 12절을 근거로 하여 우리의 모든 본성은 전체가 확실히 파괴되었음과, 구속주의 은혜를 받지 않고는 구원될 사람이 없음을 말한다.

자유의지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타락 이전의 인간의 최초 상태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먼저 인간이해에 있어서 그는 동방교회의 입장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같은 것으로 보았다. "형상"의 첫째 국면에서는 이성이라는 형이상학적 본성(donum naturale)을 통하여 하나님을 파악하고, 자연적 신 인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불멸성을 인식하는 반면, 두번째 국면의 "형상"에서는 초자연적인 은사(donum supraditum)를 통하여 하나님께 참여한다. 타락 이전의 아담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posse non peccare)과 동시에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posse peccare), 즉 자유의지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타락 이전의 상태에서는 죄를 짓지 않는 능력이라는 부가적인 은사를 받아서 선을 유지할 수 있고, 영광의 상태에서 죄를 피할 수 있다. 선택의 자유는 중립이지만, 인류는 불신앙을 택하였다. Augustine은 이 타락의 원인을 교만으로 인한 불순종으로 보고, 교만을 원죄의 본질로 보았다. 타락 이후 인간은 부가적인 은사가 상실되었고, 이로 인해 더 이상 선을 행할 자유 의지가 없어져 선을 행할 수가 없다. 이것은 두번째 국면의 하나님 형상이 상실되었음을 의미하며,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자기 자신을 파괴시킬 때 그의 의지까지 파괴되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악을 향하여 기울어져 있어, 실제 결정을 내릴 수는 있으나, 필연적으로 악을 향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사로잡힌 자유의지(liberum arbitrium captivatum)는 하나님 은총에 의해 회복되어야 한다.

특히 죄가 부모로부터 자녀에게로 전달되는 수단은 불순한 성질의 성적 욕망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는 이러한 성적 욕망을 죄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말하기를 "자식으 낳으려고 할 때, 타오르는 색정이 없는 정당하고 훌륭한 성적 교섭이란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색정으로 나지 않고 이성으로 난 것만이 자손에게 전달될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루터와 다른 점은 루터는 한 상태로서의 유전 죄는 본질적으로 불신앙이었는데, Augustine는 그것은 색정이 정신을 지배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영혼을 제압하고 있는 몸의 타락은 최초의 죄를 가져오게 한 원인이 아니라, 최초의 죄에 대한 형벌이다. 또한 타락하기 쉬운 육체가 영혼을 죄인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죄된 영혼이 육체를 타락하게 만든 것이다."

 

b. 은총 : Augustine의 은총론의 핵심은 은총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일으키는 어떤 창조적 힘이라는 것이다. 은총은 무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로서, 인간회복은 오직 은총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구속을 필요로 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포착한다. 은총은 세례로부터 시작되며, 세례는 은총을 필요로 하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사이에 관계를 맺게 하는 최초의 행위인 것이다. 유아도 세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을 수가 없고 세례를 통해서 인간의 원죄가 제거된다. 은총의 주된 작용은 하나님 사랑의 주입으로, 이것에 의해 인간의 의지는 점점 자유롭게 해방되며 정욕은 인간을 지배하는 힘을 상실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창조적 힘이 선한 의지를 불러일으킬 때 선행 은총(prevenient grace)이라고 부르며, 선행 은총으로 촉발된 인간의 의지와 협력할 때 이것을 협력 은총(co-operative grace)라 부른다. 후에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과의 논쟁에 이르러서는 은총의 불가항력성을 명백히 주장하게 된다.

 

c. 구원의 본질 : Augustine의 새로운 공헌은 구원을 칭의로 이해한 것이다. 그의 칭의의 이해는 루터처럼 죄를 용서하는 법정적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의롭게 되는 실질적인 義化의 개념이었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일으키는 어떤 창조적인 힘이 은총이라면, 은총의 작용의 결과인 구원은 악한 인간 본성의 회복, 즉 인간의 치유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간의 과정이 진행되는 가운데 계속 의롭게 되어가고, 이 과정의 종국에 가서 의롭게 되는 것이다. 과정의 시초는 믿음이며, 중간은 고난이며, 마지막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믿음으로 시작하고 보는 것으로 완전하게 된다." 이것이 그의 전체교리의 요약이다. 믿음을 선물로 받아, 회복된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공로가 칭의의 결과로 생기게 된다.

 

d. 예정 : 예정의 교리는 죄와 은총의 교리가 발전된 이후에 제시되었다. 은총은 불가항력적이고 예정된 것이다. 예정은 은총의 준비이고 은총은 예정의 결과이다. 은총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만일 인간에게 이 은총이 임하면, 인간은 그것을 거역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연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속에서도 자기의 의지를 수행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무시하고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옛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선을 선택할 수 있도록 회복된 인간의 의지를 통하여 그의 뜻을 수행하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정욕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된다. 또한 하나님이 선택된 자에게는 인내의 은사를 주신다. 인간이 구원을 받으려면 이 은사가 필요하며,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해 주신다. 그러면 어찌하여 부르심을 받은자들이 모든 은총에 순종하지 않는가? 그는 예정의 교리를 가지고 답변하였다. 영원 전부터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도록 예정되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형벌을 받도록 예정되었다. 이처럼 예정된 자들의 수는 고정되어 있고 변경시킬 수 없으며 또한 서로 교체될 수도 없다. 예정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예정의 특별한 효험으로 인내의 은사를 주신다. 이들이 타락하더라도 언제까지 그렇게 행할 수 없는 것은 이들이 한나님의 은총을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정되지 못한 자의 경우는 이와 정반대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어떤 사람은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버려 두셨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데, 이에 대한 답변은 "내가 그렇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라는 말로 족하다.

 

 

 

III.결론

초기의 마니교주의와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 간략하게 살펴본 바와 같이 Augustine의 하나님 중심의 신학과 인간의 철저한 죄성에 대한 이해는 죄와 은총을 철저하게 신약성서적으로 이해함으로써 고대 교회의 도덕주의와 잠재적인 펠라기우스주의적 요소를 극복하였다. 또한 구원론의 대전제를 바꾸어 놓았으며, "자연"과 "은총"을 일원적으로 고찰하던 동방 교회의 신학 전통을 종합시키고 중세의 문을 열었던 그의 사상적 영향은 중세 밑바닥을 통해, 종교개혁과 지금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또한 인간에 대한 다양성 안에 있는 통전성의 견해 역시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영혼의 기원과 관련된 논쟁을 종식시키는데 도움을 준다. 고대로부터 계속되어온 기독교 사상가들은 실제적으로 이의없이 그리이스의 선재론을 반대한다.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선택된 이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태초에 영혼들의 저장소를 만드셨고, 그리고 나서 역사를 통해 한 세대에서 다름 세대까지 각각의 새로운 인격의 출생과 함께, 하나님은 새롭게 만들어진 인간 존재에게 잘 맞고 이 몸 안에 다식하는 영혼을 공급하는 이 선재를 불러내실 것이다. 이것은 탁견이지만, 매우 고전적인 이원론이며, 기독교 지식에 비해서 매우 이방적이다. 또 하나는 영혼전이설이다.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도 부모로부터 물려받는다는 것이다.

영혼을 비물질적인 것으로 보는 어거스틴의 견해를 강하게 옹호한 사람은 클라우디아누스 마메르투스이다. 그는 파우스투스에게 보내는 답신으로 "영혼의 상태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통해서 고대 철학자들의 권위에 호소하면서 영혼은 비물질적이라고 거듭해서 강조했다. 클라우디아누스는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또 다른 논증으로 제시한다. 즉 만일 하나님이 비물질적이라면 물질적인 피조물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다고 말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더욱이 모든 몸은 4개의 요소 구성되어 있는데, 이중 어느 것 하나 영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어거스틴의 사랑의 개념은 성서적인 아가페 개념과는 다르다고 말하는 스웨덴의 신학자 앤더스 니그렌이 있다. 그는 Agape and Eros라는 그의 저서에서 "어거스틴은 플라톤적 개념을 신학에 끌고 들어와 신약성서에서 계시된 독특한 agape의 성격을 변질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니그렌은 agape와 eros는 서로 배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기독교적인 사고와 생활에서 에로스적 요소를 낱낱이 추적하여 제거하는 시도를 하였다. 그에 의하면 아가페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에로스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이다. 아가페는 비이기적인 사랑이요 에로스는 자아중심적인 자기 주장이다.

어거스틴의 사랑의 이론은 니그렌의 생각보다 훨씬 더 성서적이라 볼 수 있다. 어거스틴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은 제일 먼저 온다.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또 재 창조하신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는 그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 자신에게로 부르시고 또 재차 부르신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근본적으로 성서적인 관점에 서서 사랑의 이론을 역설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피조물로서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에로스를 통해서 지고선이신 하나님을 사모해야 하며 또 하나님의 사랑은 그 피조물인 인간의 사랑이 그 왜곡으로부터 풀려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완성되도록 인도하신다. 물론 여기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이렇듯 어거스틴은 행복론과 아가페주의, 창조와 구속을 종합하고 조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어거스틴의 사상과 그의 인간이해는 일반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그의 사상에 있어서 비인격화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안에서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한다는 그의 이론에 있지 않다. 비인격화의 문제는 어거스틴이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보는 그의 관점에 있다. 어거스틴의 사상은 앞으로 계속 연구되어지며, 그의 사상의 신학적 조명은 앞으로 우리가 신학함에 있어서 숙고해야 할 많은 점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 참 고 문 헌 >

선한용, 시간과 영원, 성광문화사, 1992,

어거스틴, 선한용 역, {성 어거스틴 고백록}, 대한기독교서회, 1995,

힐쉬베르거, 강성위 역, {서양철학사 上}, 이문출판사, 1994,

Augusitne, De mendacio vol 1, 27, 52, quoted in Ralph J. Bastian, S.J.,

송인설, "구원론의 역사신학적 연구 : 아우구스티누스에서 트렌트까지", 장로회 신학대학교 대학원석사논문, 1992,

J.L.니브, O.W.헤이그, 서남동 역, {기독교교리사}, 대한기독교서회, 1995,

Spykman, Reformational Theology, (대학원강의노트)

후스토 L.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II", 이형기, 차종순 역, (서울: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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