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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욱이의 생각

근본주의 신학에 대한 팩트폭행

by 정직한 글쟁이 2024.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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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의 허와 실

 

본 글은 제가 존경하며 믿고 따르는 서충원 목사님의 지도 편달이 없었으면 나오지 않았을 글입니다.

나아가 이 글이 나오기까지 아낌없이 지원해주신 복있는 사람 박종현 대표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홍성욱

 

 

1 서론

 

 

오랜 인류 역사를 되돌아보면, 긴장과 갈등으로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역사를 계급 간 투쟁으로 이해했으며, 헤겔은 이념들 사이의 경쟁으로, 또 토인비는 도전하는 세력과 응전하는 세력의 엉킴으로, 그리고 신채호는 ‘우리’와 ‘저들’의 쟁투로 이해했다.

인간의 역사는 다른 계급과 신분, 다른 민족과 인종, 다른 생각과 신앙 사이의 끊임없는 마찰과 다툼의 연속이다. 하나의 혁명가 또는 사상가가 ‘섬’일 수 없듯, 어떤 혁명 또는 사상도 지난한 역사와 시대의 산물일 뿐, 이와 동떨어져 잉태되거나 존재할 수 없다.

갈등이나 긴장이 자연스럽게 내재해 있는 역사의 현실 속 우리는 ‘근본주의’라는 사상의 교조적 횡포를 읽는다. 그것이 그야말로 횡포인 까닭은, 갈등과 긴장을 인정하지 않는 특유의 독선적인 태도 때문일 것이다. 성육신의 의미가 사람을 이해시키는 목적이라면 이러한 태도는 일반 커뮤니케이션에서도 소외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자유로운 토론과 대화를 통한, 이를테면 합리적이고 공정한 절차와 과정을 통한 상호이해와 협력의 가능성이 애초부터 배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도 하나님의 관점에 설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주의자들은 그러한 관점을 견지하면서 자신의 사고 오류 가능성과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는 오류를 범한다. 그 결과 사유와 성찰의 여지가 없는 근본주의의 야만성은 하나님의 뜻이란 이름으로 자신들의 신학을 ‘정통’ 또는 ‘정학’이라 명명하고, 자신들과 다른 생각이나 이념은 ‘이단’ 내지 ‘사학’이란 꼬리표를 붙인다.

결국 그들의 태도는 복음이 아닌 문자에 집착하는 현대판 바리새인과 다름이 없다. 그 결과 그들은 성경 전체의 주제나 맥락적 흐름, 연결되는 이야기를 고려하지 않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고 이를 통해 상황에 대한 이해를 전부 불신앙으로 소급하는 폭력을 행사한다.

 

2 본론

 

1. 상황윤리

 

예를 들면, 상황윤리가 이에 해당하는데 만일, 원치 않는 성폭력 피해로 임신했을 경우 근본주의자들은 살인하지 말란 십계명에 자신에 입장을 정당화하며 불가피한 낙태조차 살인이라고 정죄하는 사례다. 물론 모든 경우에 원치 않는 임신을 했다고 낙태를 권하는 것도 성서적이라고 보진 않는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 놓여있는 피해자에게 하나님의 섭리를 운운하며 사건의 피해조차 받아들이기 버거워하는 상대방에게 무턱대고 성경을 들이밀며 믿으라는 권위와 태도는 무례를 넘어 폭력이다.

평생 태어난 아이를 보며 괴로워하는 피해자에게 이를 양육하고 길러야 한다는 목회자의 찍어 누를 듯한 권위는 결코 성경에서 말하는 권위도 아닐뿐더러 만에 하나 피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마음속 깊이 발견하여 이에 대한 순종의 결단으로 아이를 출산하는 선택도 결국은 목회자의 권위 이전에 피해자의 믿음과 동의가 전제되어야 하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그런 믿음도 없는데 피해에 대해 받아들이지 못하는 당사자에게 무턱대고 성경을 들이밀고 낙태는 죄라고 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다른 의미에서 바리새인들이 저지른 인격살인에 해당한다.

 

 

나아가 한국교회의 이혼 문제도 다루지 않을 수 없다. 만일 결혼 초부터 그리고 사는 내내 아내가 남편의 언어, 신체적 폭력에 시달린다면 믿는 자라는 이유만으로 그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게 진정 성경이 말하는 가정의 질서에 순종하는 것일까?

남편은 정작 무위도식하면서도 반찬 없다고 밥상을 엎어버리고, 아내의 직장 근처를 맴돌며 갈구는 의처증과 거기서 끝나지 않고 아내는 물론 아이들에게까지 휘두르는 폭력 등이 만약 성경에 나와 있는 그대로 따른다면 단지, 간음만 저지르지 않았을 경우 이혼 사유가 되지 않느냐는 말이다.

이는 마치 안식일에 밀 이삭을 따먹은 예수님을 향한 바리새인들의 비판과 상황만 다르지 그 원리가 동일하게 적용된다.

물론 복음 중 가장 핵심인 ‘자아의 죽음’이 결혼 생활에서 핵심이란 사실을 부정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믿음으로 본인이 감당하지 못할 상황을 만났는데 이를 마치 하나님은 견디지 못할 시험은 주시지 않는다는 살리는 복음을 왜곡해 죽이는 율법을 들이민다면 과연 율법으로 죽고 싶은 아내의 병든 마음과 남편의 폭력으로 자신처럼 병들어가는 아이를 보며 견딜 수 없는 어머니에게 이혼은 죄라고 그 누가 정죄할 수 있느냐란 말이다.

그럼, 일제강점기도 하나님의 뜻이고, 세월호 사건도 하나님의 뜻으로 치환되는 게 불 보듯 뻔하다. 영적인 차원을 자꾸 이성적인 차원으로 옮기면 이상한 논리가 될 수밖에 없다. 누구도 예외 없이 어떤 주장도 역사적 맥락을 갖추지 않는 경우 이에 대한 상당한 왜곡은 불가피하다.

 

2. 진리의 상대성과 대화: 밀과 웨슬리의 관점에 대한 고찰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관점’을 지닌 절대주의적 사고도 경우에 따라 무용한 것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관점’에 서고자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도 이성적 인식의 한계와 언어의 한계로 인하여 절대적 관점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리를 모두 아는 사람은 드물고, 우리들은 저마다 진리의 일부만을 알고 있다. 아무튼 지식의 경우 ‘절대’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이 현대 학문적 성과의 입장이다.

이런 점에서 ‘진리의 상대성’은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지식이 동등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상대적으로 더 적절한 지식이 있고 그렇지 않은 지식이 있을 뿐이다. 옳다/그르다가 아닌, 지식의 적절성 정도의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가 바로 근본주의자들에게 필요하다. 모든 지식은 더 적절한 지식으로 바뀔 수 있고, 그렇게 수정될 때 그 차이는 현격할 수 있다. 따라서 순수한 신앙과 구별하여, 또한 그것을 훼손하지 않는 한, ‘신적 관점’을 상대화, 객관화시키는 지적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존 스튜어트 밀은 자신과 반대되는 주장에 대해 관용하면서 그 비판에 귀를 기울일 것을 주장했다. 자신의 견해만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하고 다른 의견을 억압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자세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근본주의의 극단에 상대주의가 있다는 사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어떠한 근본, 즉 기원이나 토대도 없다’는 포스트모던적 상대주의는 또 다른 형태의 근본주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밀이 말한 다른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는, 진리는 알 수 없다는 회의주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는 진리가 객관적이며 이것을 알 수 있으나, 누구도 진리를 독점하고 있지 않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의견을 억압하는 것은 틀린 의견과 옳은 의견을 대비시킴으로써 진리를 더 생생하고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놓치는 결과를 낳게 되어서다.”

그런 의미에서 독선적인 근본주의자는 C.O.D의 태도가 필요하다.

객관적인 진리(성경의 권위)가 전제될 때만이 “자유롭고 치열한 토론”, “끝장을 보듯 철저하게 토론하는 것”이 가능하다. 진실로 진리의 실재를 믿는 밀의 관점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회의주의적 상대주의적 관점보다 더 깊은 상호 간의 대화와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3. 한국교회의 근본주의와 성속이원론: 역사와 현실의 갈등

 

하지만 정작 개발 독재 시기에 한국교회의 주류로 자리 잡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신앙 체계를 정통주의(orthodoxy)로 규정하고 있지만 사실 근본주의와 전통적인 정통주의는 분명하게 달랐다. 사전적 의미로 근본주의는 “과거의 사건들, 텍스트들, 권위 있는 인물들에게 호소하고 특정한 집단을 보호하는 다양한 교리, 이야기 또는 법률을 미래에 투영하는 현대 종교 운동”을 말한다. 또한 그 집단은 “그 운동에 헌신하고 동기를 부여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돕지만 집단 외부 사람들에게는 다소 공격적인 태도와 행동을 취하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근본주의는 어떤 사상이나 원칙 혹은 이념에 대한 엄격한 복종과 신앙적 고수를 강조하며 “종교적 신앙, 도덕적 이념, 정치적 신념, 이데올로기적 강령의 뿌리를 수호하고 방어하려는 태도”를 포함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마치 종교개혁으로 잉태된 ‘개혁신학’을 표방하며 반(反)개혁적인 행보를 하는 모습과 유사하다. 마치 칼뱅을 파는 이들이 가장 반(反)칼뱅적인 셈이다.

 

 

한국교회 안에 있는 성속이원론은 역사적으로 근본주의 운동의 영향 아래 있다. 근본주의는 자유주의 신학과 진화론에 대항하여, 1920년대 미국교회 안에 일어난 운동이다. 이것은 복음 진리의 핵심을 수호하고, 세속주의의 공격에서 기독교 신앙을 지켜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이런 싸움의 과정에서 근본주의 운동은, 기독교 신앙을 시대적인 흐름에 반대하는 것으로 일방적으로 강조하면서, 복음이 문화와 과학과 정치 사회 영역과 맺는 적극적인 관련을 상실하고 반지성적, 반문화적인 입장을 택하게 되었다. 복음의 정체성을 수호하는 것이 세상에 대립하고 세상을 부정하는 것과 동일시됨으로써, 복음의 총체성을 상실한 것이다. 이런 제한성을 비판하면서 일어난 운동이 복음의 사회적인 성격과 문화적인 의미를 강조한 신복음주의 운동이다. 물론 한국의 보수적인 장로교회는 신복음주의 운동을 복음에 대한 타협이라 여기고, 이에 대해 방어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이것이 보수적인 장로교에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정서다. 우리가 세속적인 세계관을 향해 나아감에 있어서 이 근본주의적 이원론적 정서를 벗어남은 필연적이다.

 

 

다시 반복하지만 한국교회가 반지성적, 반문화적으로 된 이유는 근본주의적 신학 때문이다. 성경 진리 수호를 위해 반동적으로 나아가, 지성을 신앙과 대립시키고 세속문화와 담을 쌓고 이를 배척하게 된 역사는 진실로 세상과의 소통을 위험시하고 세계와 대립하는 걸 신앙으로 착각하게 했다.

물론 교회는 근본주의자들처럼 세속사회를 장악한 무신론적 인본주의를 비판해야 하나, 이는 신앙이 반지성적으로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반지성주의의 포로가 되었다. 세상과 소통하면서 세상을 변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합리적인 질서를 깨뜨리는 십자군적인 자세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세상 문화를 위험한 것으로 세상철학을 다 기독교복음에 반하는 것으로 보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진리의 요소를 인정하지 않고 그들과의 대화와 소통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독선과 편견이 보수적인 기독교의 이미지로 정착되었다.

비판적 사고 능력이 없고, 자기의 생각만을 무조건 확신하고 전통에 맹종하는 바리새인적인 독선을 보여준다. 이런 한국교회의 태도는 오늘의 포스트모던 문화의 관용에 정신에 반하고, 그것에 의해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런 세상의 평가는 교회가 당하는 복음을 위한 고난이 아니다. 한국교회는 진리를 독점하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자이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는 절대적이지만, 그것을 믿는 교회의 논리가 유일한 진리이고 세상의 학문을 알지 않아도 자족하다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성경의 유일무이성은 교회의 상식 없음, 이성적인 능력의 결여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안에도 일반은총의 진리가 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유로 교회가 비기독교적 세계를 배척하고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게 되면, 이는 독선이고, 교회는 세계의 흐름에서 도태될 것이다. 세상이 주를 떠나 있고 하나님의 진리를 부정하고 그로 인해 교회가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음이 사실이다.

교회는 세상의 흐름에 동화되고 종속되어서는 안 되지만,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세상에서 도피해서는 안 된다. 세계는 여전히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의 대상이고, 우리에게 도전과 유익을 주는 곳이다. 세계가 무신론적 인본주의에 지배되고 있다고 해서, 이와의 소통을 위험시하고 세계와 동떨어져 있는 것은, 죄인 세리들을 영접하고 그들을 위해 구원의 길을 제시하신 그리스도의 길이 아니고, 이방인들을 믿음으로 이끌기 위해 그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과 교제한 바울 사도의 길이 아니다.

그리고 성속이원론을 극복하고 세계 안으로 들어가 세계를 변혁한 종교개혁의 ‘오직 믿음으로’의 정신이 아니다.

 

3

 

이제 한국교회는 교회 울타리를 넘어서 광대한 하나님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세상은 단지 죄악 때문에 진노 아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주님이 다스리신다. 이것이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믿음으로’의 신앙으로 바라본 세상이다. ‘오직 믿음으로’는 피조물을 절대화하는 세상의 모든 우상들을 깨뜨리면서 그것들을 상대화한다.

동시에 그 모든 영역 안에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본다. ‘오직 믿음으로’의 정신은 제도로서의 교회를 상대화하고 특권의식 속에서 세상을 배척하는 종교적 신앙을 깨뜨린다.

본회퍼가 강조했듯이, 이제 교회는 비종교적인 세상 안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증하기 위해서 비종교화되어야 한다. 종교적인 제도 안에 머물면, 세계를 변혁하는 진정한 복음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는다. 무신론적 인본주의 사상을 배격하고 비판해야 한다. 그런데 그 안에도 우리가 들어야 할 진리의 음성이 있다. 물론 타종교 안에도 구원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 논리에 대항하여 타종교 안에는 구원이 없음을 명확히 해야 한다.

하지만 타종교는 단지 비진리와 거짓의 온상이기에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도 없고 그들의 진리를 수용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논리야말로 편협하고 위험하다. 타종교 안에도 하나님이 주신 일반은총의 진리가 있고 그것은 우리의 복음 진리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사회정의, 생명 사랑, 공감과 배려의 정신 등등 인간 보편적인 진리는 비신자들 안에 무신론자들 안에 타종교 안에 들어있고 우리에게 도전을 준다. 그리고 우리는 때로 그들에게 배워야 한다.

‘나는 이미 옳으니 더 이상 들을 필요도 배울 필요도 없다’는 근본주의자들의 태도야말로 무신론자들의 교만한 태도와 다름없다. 하나님의 음성에 경청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소리 안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독선과 편견을 깨뜨리고 좀 더 겸손과 공감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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