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욱이의 생각

기독교는 금욕주의인가?

by 정직한 글쟁이 2024. 1. 9.
반응형

금욕주의와 율법주의는 쌍둥이다.

 

 

복음의 내용 전체가 율법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하고 있다.

 

율법주의이면 이는 성경에 있는 내용을 문자적으로 따른다고 하면서 금욕주의와 함께 갑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율법주의"는 주로 구약 성서에서 언급되며, 하나님의 율법 또는 계명을 엄격하게 준수하고 이행하는 신앙과 생활 방식을 의미합니다. 율법주의는 특히 모세의 율법(창세기 20장에서 나온 10계명을 포함한 여러 법률)을 중심으로 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성서의 법률을 정확하게 따르고 이행해야 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그 축복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위반하는 것을 죄로 여기며, 죄를 피하기 위해 법률을 준수하려 노력합니다. 이러한 율법주의적 접근은 특히 유대교와 그의 변형인 근본주의 기독교의 일부에서 주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새로운 언약을 통해 율법주의의 한계를 논의하고 변화시키는 과정도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 신앙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 아래에서 율법을 이행함으로써 새 언약의 은혜와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이로써 기독교는 율법주의적인 접근과 은혜의 균형을 찾으려고 노력하며, 이것이 다양한 기독교 고전주의의 입장과 연관됩니다.

 

 

 

즉 율법을 따른다고 하면서 금욕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복음은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것과 육체의 욕구를 긍정하는 것이 함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믿음으로가 맞습니다.

이는 바울 복음의 진수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이전에는 철저히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려고 하면 율법을 지켜야 하고

율법에 명하는 법을 따르려고 하니까 육체의 욕망을 제어해야 하고,

육체의 욕망을 제어한다는 게 내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한다고 하면 그것이 금욕주의로 가지 않는데,

은혜가 아니라 율법적인 틀을 가지고 자신에게 억지로 그것을 자기 스스로 제어하려고 하니

이것이 바로 금욕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즉 율법주의는 율법을 철저히 지켜 행한다는 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일이라든지, 뭐 이러저러한 일을 하고 안 하고, 거짓말 안 하는 것 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고, 나아가 율법주의와 연관되면서 근본적으로 율법을 어기게 만드는 게 육체의 욕망이기 때문에 육체의 욕망을 제거하기 위해서 이를 깨뜨리고 그것을 금하려고 하는 게 금욕주의입니다.

그렇기에 율법주의와 금욕주의는 같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함을 이루는 게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명령이고,

이는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그런데 이를 인간 편에서 충족시키려고 하는 게 율법주의이고, 금욕주의입니다.

즉, 그 거룩함을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게 되는 게 바로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주어진 광야에서의 깨어짐 역시 어떻게 보면 욕망이 다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금욕주의와 비슷합니다.

 

 

이 역시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율법주의와도 비슷한데요.

즉 초점은 율법을 향하고 내 욕망을 제어한다는 것에 따라 금욕주의는 율법주의와 유사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즉 유대인들이

율법주의와 금욕주의로 간 게 거룩함을 이뤄야 하니까 그것을 어떻게 할까?

그렇게 고민해서 고안해 낸 게 바 율법주의와 금욕주의입니다.

 

모든 종교들이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주어진 죄성 때문에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공적이지 못하지만, 어느 정도까진 성공을 합니다. 잘라버리면 안하긴 하니깐 말입니다.

 

최근 소신공양한 자승 스님이 그 최후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불교같은 경우 전형적인 율법주의와 금욕주의의 모습을 보입니다.

물론 그 안에서도 어느 정도의 성공은 있습니다.

인간이 노력해서 욕망을 거슬러 갈라고 하니까.

그런데 그것은 은혜가 아니면 성공할 수도 없고, 성공을 설사 하더라도 교만해집니다.

그러니까 율법주의와 금욕주의를 바울은 철저히 배격했고,

율법주의와 달리 성령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은혜와 믿음으로 대결하게 하도록 그리로 이끌어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은혜가 된다면 과연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도 될까요?

안식일은 사실상 의미 없어진 지 오래입니다.

 

 

그럼 주일을 지키지 않아도 되느냐는 질문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안식일)은 사실 더 이상 우리에게 지켜야 할 규범적인 명령이 될 수 없습니다.

이는 사도바울이 이미 이야기했고,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이 완성되었으므로,

그리스도로만 만족하며 음식이나 절기를 지키는 것 등으로 인해 헐뜯는 말들에 좌우될 필요가 없음을 뜻합니다.

즉, 우리가 믿음 안에서 살면 모든 날이 안식일이며, 하나님이 주신 날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계명은 그렇지 않습니다.

안식일일 경우에 한 해서만 그것은 명시적으로 사도바울이 씨름했던 갈라디아서에서도

날이나 절기를 지키는 것에 대해서

그것에 더 이상 매어있을 필요가 없고 율법의 멍에라고 표현했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자유케했고 그러니까 안식일이라고 하는 외적인 규범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게 더 중요하게 된 것입니다.

 

즉 다른 십계명들과 비한다면 그것은 우리 내면의 인격적인 도덕성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즉 이로부터 자유롭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계명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중 안식일의 계명 같은 경우 이미 명시적으로 그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예수님 역시 행동으로 보이셨고,

사도 바울은 명시적으로 또 그것을 언급했습니다.

 

나아가 종교개혁자들의 경우도 (칼뱅까지도) 주일(주일성수)은/는 그런 개념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고

안식일을 강의하면서 주일성수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그 날을 구별해서 지킨다는 것은 4계명을 그렇게 지킨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는 날을 교회가 정한 규칙으로  정한 것이다.
따라서 그런 것을 하나님의 명령, 즉 계명으로는 보지 않는다.

 

 

 

물론 주일을 복받기 위해 가는 날로도 이해할 수는 있으나

어떤 모양이든 우리가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게,

우리가 가진 인간적인 특성에 따라 일주일에 한 번씩 정한 날을 구별하여 드리는 게

하나님 앞에 드리는 데 보다 나은 그야말로 덕을 세우는 의미에서 합당합니다.

 

즉 그야말로 절대적인 안식을 지키라는 게 십계명의 4계명 정신입니다.

옛날로 말하자면 술, 담배 같은 경우와 유사합니다.

뭐 안식일이나 술, 담배가 모두 동일 연장선상 아래 놓여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교회는 최근 안식일은 약화되었고,

술 담배는 여전히 교회 전통에 있어서 그것을 구별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주일 성수는 보다 약한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 우리 한국 교회 안에서 술담배를 금하는 게 주일 성수와 비교할 때

현재 그 정도 비중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옛날과는 다르게 되었습니다.

옛날에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목숨을 걸고 주일 성수를 지켰습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성서에 도덕법이 아닌 허용된 진술의 경우

그것은 시대나 상황에 따라 변화가 있고,

또 그 변화는 허용할 수 있습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