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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욱이의 생각

내가 믿고 있는 바 "길동이의 신앙고백"

by 정직한 글쟁이 2024.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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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파 신앙과 도덕성

 

샬롬누리영광교회

서충원 목사님

 

 

 

개혁파 신앙을 가르치는 목회자가

박사학위논문을 표절하고,

거짓말을 하고,

성도들을 성추행하고,

자녀에게 교회를 세습하고,

돈을 뿌려 선거에 당선되고,

가짜 박사학위를 받고,

불법을 자행하고,

교회재정을 사익을 위해서 유용할 때,

이에 대해서 개혁파 신학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오늘날 목회자의 세속적인 야망과 부도덕한 행동으로

기독교의 신뢰가 땅에 떨어지게 되었는데,

이 부끄러운 행태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그리고 목회자들이 성경을 가르치면서도

여전히 죄에 매여 사는 것에 대해서

이것은 전적인 부패의 증거이고

인간의 도덕적인 무능력의 증거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한 것을 보여주는 것인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실패는 개혁파가 가르치는 전적인 부패성의 증거인가?


칭의와 성화

개신교는 선행의 공로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가톨릭의 교리에 반대하며,

선행으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음을 강조함으로 출발했다.

 

 

우리의 선행으로써는 하나님의 엄중한 의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없으며,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될 때

우리가 그분의 심판 앞에 설 수 있다는 것개혁파의 칭의교리이다.

 

 

행위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개혁파 신앙의 강조점은 인간의 철저한 부패성과 선행을 향한 의지의 무능력의 자각이다.

인간이 자신의 선행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은 곧 인간의 도덕적인 능력에 대한 깊은 절망을 말한다.

개혁파 신앙은 자신의 노력으로 선을 이룰 수 있고 본성을 따라 행하게 되면

인간이 선하게 될 수 있다는 세속적인 철학의 신념에 대항하여 인간의 도덕의지의 한계를 강조한다.

 

인간에게 선을 향한 의지가 있지만 그것은 온전하지 못하다.

이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의식하면서 더욱 은혜가 필요함을 강조하게 된다.

그러나

선행은 신앙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선행은 진정한 믿음의 열매이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개혁파 신앙은 특히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가 선행의 열매를 맺어야 함을 강조한다.

 

율법의 제3용도에서 말하는 것처럼, 율법은 단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의 앞에 절망하게 할 뿐 아니라,
율법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법을 따라 행하도록 규범을 제시한다.


개혁파 신앙의 핵심은 성화의 추구이다.

개혁파 신앙에 있어서 도덕적인 행위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도덕적 행위로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도덕적 행위는 참된 신앙의 필수적인 열매라는 것이다.

 

 

인간의 도덕성이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도덕의 추구에 대해서 개혁파 신앙은 비판적이면서,

동시에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성화를 추구함을 본질로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점에서

도덕적인 추구는 새롭게 긍정된다.

 


 

칭의와 도덕성

 

사람들의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도덕적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는

칭의교리는

도덕적인 행위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이 행위에 대한 강한 긍정이다.

 

 

하나님의 의라는 도덕적인 기준,

율법의 기준이 선포되고

그로 인해서 모든 교만과 자랑이 깨지면서

행위에 대한 부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칭의교리는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함을 의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거꾸러지고 압도당하는 자기인식을 전제한다.

 

오직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는 믿음은

행위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단지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는 믿음이 아니다.

 

오직 믿음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절망적인 곤경에 처한 자기를 인식할 때,

인간이 자신 안에 어떤 구원의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으로’에서의 믿음은

하나님의 의의 엄중성 앞에서 비추어진 자신의 더러움과 악함에 대한 인식과

이로 인해서 인해서 일어나는 진노의 두려움에 대한 인식을 의미한다.

 

따라서 믿음은 도덕적인 의식의 민감성이다.

 

보통 사람들이 자신을 의식함보다 더 강한 민감성으로

자신의 도덕적인 부끄러움을 의식하게 되고

이로 인한 영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이를 통해서 회개에 이르고 용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성화의 추구에 앞서서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고

의의 전가를 통해서 구원에 이른다는 칭의신앙은

이미 그 안에 깊은 도덕성이 전제된다.

 

다시 말해서 엄중한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하는

율법의 정죄를 통해 자기부정이 주어지는 것이다.

 

칭의교리는 죄인에 대한 용서가 핵심이지만,

먼저 율법의 정죄가 전제되고 이로 인한 절망이 전제된다.

율법의 정죄 앞에서의 절망이 없는 칭의는 없다.

율법의 심판 없는,

이로 인한 겸손과 낮아짐이 없는 용서는

개혁파적인 구원이 아니다.

 

개혁파의 은혜의 교리는 율법의 엄중한 심판을 전제한다.

 

그리스도의 칭의의 은혜를 경험한다는 것은

곧 그의 두려운 심판 앞에 선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전적인 부패의 교리를 믿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운 임재를 경험한 바탕에서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발견한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전적인 부패성과 도덕의지의 약함을 인식하게 될 때,

이것은 도덕적인 삶에 있어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그리스도인이 범죄에 빠지면서

자신의 행위를 전적인 부패교리에 근거하여 정당화할 수 없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고 그의 은혜를 안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과 다른 두려움과 절망을 의식하게 된다.

 

은혜라 함은 죄에 대한 묵인과 관용이 아니라

엄중한 심판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대신 담당하셨다는 것이고,

따라서 십자가에서 나타난 그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 앞에서

철저한 깨어짐을 경험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칭의의 신앙은 지속적으로 성화의 근거가 된다.

이 점에서 칭의신앙은

가톨릭이나 인본주의자들의 도덕성의 추구보다

더 강한 도덕성의 추구를 동반한다.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서 자신을 죄인으로 의식하게 된 자들은

자신의 양심의 기준이나 사회적인 윤리기준에 비추어서

도덕을 추구하는 자들에 비해서 탁월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서 반성하고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율법의 찬란한 빛 앞에서 자신을 검토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느끼지 못하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은혜는 죄를 덮고 묵인하고 정당화하는 데 적용될 수 없다.

은혜는 모든 인간적인 변명과 낮은 수준에서의 비교를 깨뜨리고

하나님의 높은 기준에 올려놓고 그 앞에서 모든 변명과 자랑을 깨뜨리고

이로 인해서 깨어진 자들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게 되고

이로 인해서 용서와 치유의 은혜의 감격에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도덕적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는

의교리는

인간의 부족한 행위에 대한 면죄부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자랑과 교만을 부수는 망치이다.

 

 

인간은 죄인으로 낮추어서

그의 은혜로 나아가게 하기 위한 준비를 행한다.

 

은혜의식의 바탕은 깊은 죄의식이다.

자신의 부끄러움에 대한 깊은 자각이

다른 이들에 비해 더 탁월한 것이다.

 

도덕적인 선행을 강조하는 가톨릭보다

개혁파가 더 도덕적일 수 있는 이유는

그 기준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은혜를 안다고 하고 은혜를 가르치면서

자신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자각과

부끄러움이 없는 것은 그 자체 모순이다.

 

 

은혜를 안다면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깊은 자각이 일어나고,

부도덕한 행위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거기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칭의교리는 우리의 행위는 그분 앞에서 상관이 없고

단지 믿음뿐이라는 통속적인 칭의이해와 전혀 다르다.

 

칭의교리는 도덕적 행위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강화시킨다.

 

칭의교리는 구원에 있어서는

행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교리가 아니다.

 

자신의 행위에 근거하여 구원을 의심하고

절망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을 바라보라 하시지만,

자신의 죄에 대해서 부끄러움이 없는 자들에게도

행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행위는 중요하다.

그분의 거룩함 앞에서 우리의 행위는 너무도 중요하다.

단지 그분 앞에서 우리의 행위로

그분의 의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고

그분의 의를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를 입는 것은

바로 우리의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을 통해서이다.

개혁파 신앙을 가르치는 목회자들이

부정과 부패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만큼 이들의 신앙은 위선이다.

세상의 도덕적인 수준에서도 비난을 받을 행위를 하면서도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고 자기를 정당화하는 것은

자신의 죄인됨을 알지 못함이고 또 이것은 은혜를 부정하는 것이다.

 

 


성화와 도덕성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은혜를 경험했기에

세상 사람들에 비해서 도덕적으로 탁월하게 나을 수 있는가?

아니면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 죄의 종이기에

세상 사람들보다 더 높은 기준을 가지고 살고 또 죄에 대해서 회개하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는 점에서 낫지만

세상 사람들과 그렇게 다른 삶을 살 수는 없는가?

 

많은 이들이 경험하고

또 더 나아가서는 믿는 바는 후자인 것 같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는 모습을 보면

후자가 더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경과 개혁파 신앙이 가르치는 바는 전자이다.

 

먼저 중요하게 언급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의 도덕성의 추구와

비그리스도인의 추구가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들이고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도덕성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성과 의지로 말하는데

이는 바로 도덕적인 판단과 의지가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을 이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과 악을 구분하는 이성과

이 이성의 명령에 따르는 의지가 제대로 작동할 때,

인간은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게 된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함으로 이성은 빛을 잃었고

의지는 본래적인 자유를 상실하게 되었다.

 

비그리스도인의 도덕적인 추구는

한편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주고,

또한 그것은 이미 죄로 인해서 오염되어

더 이상 처음 아담에게 주어진 방식으로 기능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도덕적인 목표를 이루고자 하나

이미 의지가 욕망에 매여 있어 죄에 빠지고,

또 도덕을 추구하나 도덕성의 기준은 왜곡되고,

또 도덕적인 성취를 이룬 자들은 교만과 자기 의에 빠진다.

 

그러나 비그리스도인 안에도

양심의 법이 작동하고 있고

이들의 도덕의 추구는

부자유한 가운데 있는 의지의 자유를 보여준다.

 

인간이 전혀 의지가 자유롭지 못하다면

죄에 대한 책임 자체를 물을 수 없다.

 

인간의 도덕의지는

그 자체 하나님의 형상의 잔재를 보여주면서

또한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서 소외된 인간의 실상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인의 중생은

이렇게 상실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며

이를 통해서 노예의지가 자유의지로 회복된다.

 

그리스도인은 명시적으로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알게 되고

이 점에서 이성의 판단력이 회복되고

또 의지가 자유케 되어

이전에 순종할 수 없었던 율법에 순종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처한 죄의 종이 아니다.

 

이제는 의지가 자유롭게 되었다.

이제는 새 영과 새 마음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율법을 행하고 산다.

 

따라서 그리스도 밖에서

자신의 양심으로 선을 행하는 불신자들과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들은

도덕의 추구에 있어서 동일한 조건에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자연적인 본성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본성으로 행한다.

그리스도인은 따라서

이성의 빛과 도덕성으로 행하는 자들보다

더 나은 도덕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은 더 높은 도덕적인 기준으로 행하고

또 실제로 자유케 된 의지로 이를 성취한다.

 

물론 개혁파는 완전한 성화가 불가능함을 말한다.

 

개혁파 신앙은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새로워졌고

이미 죄에서 자유케 되었으나

타고난 부패가 여전히 작동함을 강조한다.

이 점에서 개혁파 신앙은 인간의 현실에 대해서 낙관적이지 않다.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계속되는 자기 자랑과 신뢰에 대한 깨뜨림을 의미한다.

 

인간은

타고난 부패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는

강한 죄의 세력을 지니고 있다.

 

인간의 부패함을 강조하고

완전성화의 불가능을 말하는 것은

은혜의 한계를 말함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의 깊이에 대한 자각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움을 의미한다.

 

도덕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인이 오래 믿으면

행위가 나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를 하나님 앞에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성화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열정적인 추구에서

나오는 주장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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