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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욱이의 생각

6.25 전쟁 속 천사 카폰 신부님

by 정직한 글쟁이 2023.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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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캔자스주에서는 요즘 70년 전 숨진 천주교 사제에 관한 뉴스가 연일 쏟아지고 있다. 캔자스 출신으로 6·25 전쟁에 미 군종 신부로 참전했다 중공군에 끌려가 35세로 숨진 에밀 카폰 신부다.

 

이달 초 미확인 실종 군인 유해들 사이에서 DNA감식을 통해 그의 시신이 확인됐다는 미 국방부 전쟁포로·실종자확인국 발표 뒤 카폰 신부의 시성(諡聖)이 가시화됐다는 전망과 기대가 잇따른다. 지역 일간지 ‘위치토 이글’은 “유해 수습으로 카폰 신부가 성인의 반열에 오를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고 보도했다. 캔자스주 위치토 천주교 교구 소식지도 최신호에서 “장래에 시성 절차에 들어갈 것을 고대한다”는 주교 발언을 전했다.

 

6·25 전장에 군종신부로 파견된 카폰 신부가 군용 차량을 제단 삼아 야외에서 병사들을 위한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미 육군 홈페이지

 

 

카폰 신부에 대한 관심은 미 전역으로 확산하는 양상이다. 캔자스 지역구 로저 마셜 연방 상원의원이 발의한 추모 결의안은 지난 16일 상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재조명되는 신부의 삶은 어땠을까.

스물네 살이던 1940년 신부로 서품된 그는 6·25가 터지고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1950년 7월 16일 한국 땅을 밟았다. 인천 상륙 작전 성공으로 평양을 탈환한 뒤 북진하는 유엔군과 함께하며 부상자를 구하고 전사자를 위한 임종 기도를 했으며, 다친 적군까지 돌봤다.

 

천주교 사제이자 육군 대위였던 카폰 신부의 생전 모습. /미 육군 홈페이지

 

그해 11월 쏟아지는 중공군 공세에 퇴각 명령이 떨어졌지만, 낙오 병사들을 돌보기 위해 지시를 거부하고 전선에 남았다가 중공군 포로로 끌려갔다. 열악한 환경으로 사망자가 쏟아져나오는 수용소에서 미군들을 돌보던 카폰 신부는 중공군이 강제로 사상 교육을 하려 들 때면 점잖고도 단호하게 “당신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중공군의 눈엣가시로 구타와 학대에 시달리던 신부는 1951년 봄 수용소에서 생애 마지막 부활절 미사를 집전한 뒤 5월 23일 숨을 거뒀다. 이 같은 구체적 행적은 그와 함께 수용소 생활을 했던 미군들의 증언을 통해 전해졌다.

 

2013년 카폰 신부에게 추서된 명예 훈장 /미 전쟁포로 실종자확인국 홈페이지

 

2013년 대통령이 군인에게 주는 최고 등급의 ‘명예 훈장’을 뒤늦게 받은 데 그치지 않고, 카폰 신부를 천주교 성인으로 추대하려는 운동은 탄력을 받고 있다. 1993년 교황청이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한 그는 이제 시성을 위한 다음 단계인 기적 심사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참군인이자 박애를 실천한 종교인이었던 그의 유해 확인으로 삶이 재조명되는 지금이 기적의 순간일지 모른다.

카폰 신부의 삶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의 삶의 궤적을 들여다보면, 오랜 우방과 적군을 식별할 수 있으며, 왜 분단이 고착화됐고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지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미 동맹 간 신뢰 구축에 관한 제언이 쏟아지는 요즘, 우리 보훈 당국과 종교계가 합심해 국경을 초월한 추모에 동참하면 어떨까. 무엇보다도 카폰 신부의 삶은 아픈 우리 현대사의 일부이기도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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