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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욱이의 생각

한국 기독교의 반지성주의

by 정직한 글쟁이 2023.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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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공이 물었다.

“군자도 미워하는 것이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남의 허물을 떠들고 다니는 자를 미워하고,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헐뜯는 자를 미워하고, 용감하지만 예의염치가 없는 사람을 미워하고, 자기주장은 고집스럽게 주장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 않는 사람을 미워한다.”

[子貢曰: “君子亦有惡乎?” 孔子曰: “惡稱人之惡者, 惡居下流訕上者, 惡勇而無禮者, 惡果敢而窒者.”]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자공)야, 너도 미워하는 것이 있느냐?”

자공이 대답하였다.

“남의 생각을 표절하여 자신의 지혜로 삼는 것을 미워하고, 불손한 행동을 용기로 여기는 것을 미워하며, 남의 비밀을 들추어내는 짓을 정직하다고 여기는 것을 미워합니다.”

 

[曰: “賜也, 亦有惡乎?” 子貢曰: “惡徼以爲知者, 惡不孫以爲勇者, 惡訐以爲直者.”]

- 『論語』 「陽貨」

목사님이 풍년인 시대에 살고 있다. ‘머리 깎았다’고 다 중이 아닌 것처럼 ‘교회 다닌다’고 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아니다. 스님이라고 해서 다 성불한 것이 아닌 것처럼 목사님이라고 해서 다 예수님을 닮은 것도 아니다.

입만 열면 하나님을 말하고 걸핏하면 성경을 들먹이지만, 정작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조차 모르는 양복을 입은 무당이 도처에서 선지자 노릇한 위선의 시대를 살고 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personality’에 있는 것이 아니라 ‘value’에 있다.

술·담배 끊었다고 거듭나고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을 반드시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맥킨타이어의 주장 역시 거듭나지 않은 발언이거나 오염된 것은 아니다.

핵심은 이것이다. 오욕과 칠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생은 아무도 없다. 내 안의 위선과 가식을 직시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자기 부정’에서 시작한 ‘오직 믿음’, ‘절대 긍정’에 있다. 십자가만을 강조하여 부활의 즐거움을 묵시한다든지 자신의 일천한 경험을 보편화하여 그것이 마치 성경의 절대기준 인양 호도하는 것은 흔히 말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뿐이다. 자신의 사고와 안목의 지평을 넓혀서 역사와 자신을 객관화시키려는 노력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왜곡된 신념은 고착되어 끊임없는 오류를 반복 재생산해내고 말 것이다.

소위 기독교인이랍시고 종교 지도자를 자처하는 인생들에 권면하고 싶다. ‘신학’을 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인간학’에 통달하라. ‘神’을 안다고 주장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人間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균형 감각을 갖춰라.

성경은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이성의 영역으로 깨달을 수 없다 하더라도 결코 상식의 구조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 신앙의 힘은 이성과 과학을 초월하는 것이지만, 생활 속의 신앙은 이성과 대화하고 과학과 소통해야만 한다.

‘성경 문자주의’나 ‘근본주의’의 신앙은 이성을 무력화시키고 무지를 충동질하는 영적 홍위병 노릇에 지나지 않을뿐더러 여전히 ‘미토스’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주술적 신앙에 불과하다.

 

기독교는 ‘성경’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증거 하는 ‘그분’을 믿는 것이다. 유대교의 전통이나 바울의 기독론을 절대 진리로 믿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기록을 통해 그분의 정신을 믿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가 살던 시대의 동시대 사람을 위해 쓴 것이지 이천 년이 지난 현세의 인류를 위해 기록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비행기로 하늘을 날고 컴퓨터로 국경을 넘나드는 유비쿼터스의 시대를 살 것이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성경이 진리이기 위해 반드시 문자적으로 진리여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간에서 말하고자 하는 예수의 정신을 이해하고 그 진리를 오늘에 적용하고자 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다. 지나치게 ‘성경 문자주의’에 집착한 나머지 오직 성경만이 절대 진리라 주장하며, 나머지 인류의 보편적 지혜를 부정하고 천시한다면 맹신과 광신이 되어 반드시 세뇌된 채 독단의 도그마에 빠지고 말 것이다.

믿음은 ‘무지의 세계’가 아니라 ‘궁극적 깨달음의 세계’이다. 성경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인간학’에 대한 고뇌와 성찰이 선행되어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교회 연차가 쌓이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인격과 도덕성의 우위를 담보해 주지 못한다. 인격과 도덕성이 형편없는 기독교인을 우리는 신물 나도록 경험했기 때문이다.

신앙은 ‘배타(排他)’가 아니라 ‘이타(利他)’가 되어야 한다. 죽이는 것은 ‘율법’(문자)이고 살리는 것은 ‘영(Spirit)’이다. 예수의 교훈은 ‘공생(共生)’이나 ‘상생(相生)’ 정도의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기꺼이 희생의 제물로 드리기까지의 ‘이타적(利他的) 삶’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대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났다면 감히 함부로 신분을 주장하지 말라. 아울러 그대가 신학교를 나왔으되 예수의 정신에 무지한 무신론자라면 마땅히 목사의 신분은 버리고 종교학 전공자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밝혀야 옳지 않습니까?

십자가는 버리고 영광은 누리겠다는 얄팍한 장삿속으로 인간에 대한 기초적 예절도 갖추지 못한 자들이 남을 변화시키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겠다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예수를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일일 것입니다.

논어의 예화에서 말한 ‘일곱 가지 미움받을 죄’에서 한 가지도 걸림 없이 자유 할 수 있다면 비로소 예수님께서도 그대의 신분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실 것이다.

 

본 포스팅은 박황희님의 글을 Reference로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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