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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욱이의 생각

우리의 행복을 원하시는 하나님

by 정직한 글쟁이 2023.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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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욕주의로부터 벗어나라

 

 

막 2:18-22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기독교는 이 땅에서의 삶을

소극적으로 살게 하는 종교가 아니라

이 땅에서의 삶을

보다 건강하고 아름답고 활기차게 하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로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복음 10:10)


그리스도를 믿고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사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라 할 때

이것은 세상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지만, 

종교적인 금욕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제자도를

금욕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세상 욕망에 대해서 죽는 것은

이 땅에서의 삶을 등한히 하거나 경멸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세상에 대해서 죽는 것은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해서

소극적이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만큼

복음에 대한 큰 오해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살기 위함입니다.

주와 함께 십자가에 죽은 사람은

더 행복한 삶을 영위합니다.

믿으면서도

피곤하고 힘든 인생을 사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을 누리는 인생과 거리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더욱 열정적이고 더욱 용기가 넘치게 됩니다.

믿음이란 어떤 한계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생명력입니다.

 

더 온전히 죽어야 할 이유는

더 행복하고

힘차게 살기 위함입니다.

 


  

금욕적인 신앙의 틀을 깨뜨리고

 

 

   예수님이 당시의 신앙인들과 너무도 달라서

지속적으로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께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질문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전통적인 유대교를 대표하고

세례요한은 새로운 신앙의 흐름을 대표했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들과 너무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금식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면서

죄로 이끄는 욕망을 절제하고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표시입니다. 

 

 

금식한다는 것은

세상을 향했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특별히 주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온 세례요한은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킬 것을 선포하면서

제자들에게 보다 거룩한 삶을 위해서 금식을 훈련했습니다. 

 

그런데 의아스럽게도 예수님과 제자들은

세례요한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하면서도

그들처럼 금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리들과 먹고 마시는 것을 즐거워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질문하는 이들에게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께 질문하는 자들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왔고

이제 전적인 전환이 일어난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신랑이 왔고 이제는 기뻐할 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는데

지금의 회개는 이전의 회개처럼 죄를 뉘우치고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

금욕적인 종교 의례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새 나라의 도래를 기쁨으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핵심은

주께 돌이켜 그를 영접하고

그가 주시는 사랑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님 안에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고

그분 안에서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의 기쁨을

잔치로 표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제 고통은 끝났고

나님의 사랑 안에서

더 이상 이전의 슬픔과 저주는 없다는 것을 믿고

기뻐하며 먹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삶에 오신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제까지 고통은 지나갔고

주님으로 인해서 진정한 기쁨이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받았습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그분의 사랑이

우리의 삶의 기쁨과 자유의 근거가 됩니다. 

 

사랑의 나라에 사는 기쁨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선한 행위를 해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행위의 종교성은

이제 주의 은혜의 영성으로 바뀌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놀라운 기쁨의 복음으로

바뀌었습니다. 

 

금욕이 아니라 생명의 누림입니다. 

 

이전에 욕망의 매임은 있었지만

진정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슬픔과 두려움이 삶을 지배했다면

이제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욕망의 매임에서 자유롭게 되어

모든 삶에 기쁨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금욕적인 삶이라는 것은

낡은 부대의 사고방식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금욕의 종교성은 낡은 부대의 영성입니다. 

복음의 영성은 금욕적인 것이 아니라

기쁨이 안에서부터 밖으로 터치고 나오는 영성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심각하고

진지한 사람이기보다

여유 있고 자유롭게 쾌활한 이들입니다.

 

신앙생활에 열심인데 인생을 비관적으로 보고

다른 이들의 잘못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이 습관화된 이들은

복음의 새로운 포도주를 종교성의 낡은 부대에 담은 자들입니다.

 

삶의 자유와 기쁨이 없는 신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고 있지 못한 이들입니다.

 

 

 


 

  세속적 욕망과 종교적 금욕을 넘어

 

  

오늘날 세상은 세속화되었고

더 이상 종교적인 금욕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과거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인이나 세례요한과 같은

금욕적인 종교를 추구하는 이들이 다수였다면

지금은 서구문화가 기독교 신앙에서 벗어나서

욕망을 마음껏 추구하고

어떤 금욕적인 삶의 방식도 인정하지 않는 경향입니다.

 

 

욕망을 제한하는 금욕적 종교는

더 이상 사람들의 삶에 영향이 없습니다.

 

이제 교회조차도

이런 시대적인 흐름을 따라서

세상의 욕망의 추구를 인정해 주는 경향을 보입니다.

 

성 도덕은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대중문화는 온갖 불륜을 미화하고

청소년들은 이런 문화에 오염되어

정신이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금욕적이지 않은 주님이 주시는

기쁨의 새 포도주를 누리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복음은 율법의 경직된 종교성이 아니고

오히려 율법의 억압에서 자유롭게 합니다. 

 

주님은 안식일이나 금식이나 십일조나 정결예식과 같은

율법적인 종교의식에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면서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가 죄 용서 받고 사는 것이며

더 이상 율법의 억압에 따라야 할 의무는

벗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율법에서 자유롭게 하는 복음은

우리를 죄악된 욕망을 허용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에서 자유케 되는 것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율법의 요구인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금식하고 정결한 음식을 먹어도

그것이 죄로 향하는 마음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으면 금식하지 않고 성별된 음식을 먹지 않아도

주님이 우리 안에 주신 생명으로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복음 안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육체의 욕망을 허락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금식 같은 종교적 행위로

죽이려 해도 죽일 수 없는

육체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능력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금식하지 않고 마음껏 음식의 맛을 즐겨도

세상 욕망의 덫에 빠지지 않습니다. 

육체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게 하는

유혹의 욕심으로 빠지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자유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 5:1)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내가 이것은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 15:11)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요 10:10)

 

세상은 육체의 욕망을 채움으로 얻는 기쁨이지만

우리의 기쁨은 육체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누리는

주님의 놀라운 기쁨입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욕망의 기쁨도

종교적인 금욕의 고통을 넘어서서

주님과 연합함에서 오는

풍성한 생명, 자유, 기쁨의 새 포도주를 맛봅니다. 

 

우리는 세속의 욕망에서 피하여

종교적인 금욕으로 나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주 안에는 전혀 다른 하늘의 기쁨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 

세상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오늘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자유주의는 파멸의 길입니다. 

 

욕망을 부추기는 쾌락은

자유와 기쁨과 생명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탄의 거짓말이고 덫입니다. 

복음적인 자유를

세속적인 자유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금식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지

죄악의 욕망을 허용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적인 금욕보다 더 철저한 죽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욕망을 날마다 죽이는 사람입니다. 

욕망의 추구를 자유라고 강변하는 거짓말에

청년들, 청소년들이 미혹되어

사탄의 함정에 빠지는 것을 봅니다.

 

죽음을 통과하지 않으면,

단호히 오늘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면

제자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생명을 누려야 합니다. 

생명과 자유와 기쁨이 없는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하는데

삶이 경직되어 있고

마음이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경험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금욕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생명을 날마다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삶에 대해서 열정적이고 인생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어둡게 보고 세상을 비관하는 이들은
주님을 제대로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누리는 기쁨으로

사람들에게 빛이 되어야 합니다.

 

 

새 포도주가 여러분의 삶에 넘쳐 나기를 축복합니다.

고통과 슬픔 속에 사는 이들에게 기쁨을 전달해 주는 이들이 되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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