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욱이의 생각

믿었는데 죄를 짓습니다. 구원 받을까요?

by 정직한 글쟁이 2023. 7. 2.
반응형

흔히들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죄를 짓고 회개하면 다시는 그 죄를 반복하지 않는 게 회개다.

 

그런데 이 말을 포함해

성서에서 말하는 회개란

“죄를 한 번도 안 짓는다는 뜻이 아니고 자꾸 그것이 없어지며 성경이 말하는 방향으로 가는 걸"

의미합니다.

이러한 방향성이 있다면 누구나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나 그런 성화를 향해 나아가려는 분투가 전혀 없는 이를 향해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선포합니다.

고린도전서 6:9-11 천주교 성경

 

불의한 자가 하느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느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이런 말이 종종 들립니다.

나이가 들수록 노욕이 더 커진다.

분명 고쳐져야 할 죄입니다.

 

현실에서 제가 만나는 교우분들 대부분은 나이가 들수록 욕심이 줄어들기는커녕(성화보다는) 욕심이 더 많아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지도자부터 성도에 이르기까지 노년에 좋지 못한 모습을 왕왕 목격합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저 같은 일개 무명의 전도사도 느끼는 이러한 불편들을

그분들 역시 느끼지 못한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진정 그분들이 회개했다면 우리가 고린도전서에 읽었듯

그렇게 탐욕을 추구하는 일들을 그치고 “아 이제는 내가 베풀고 나누면서 살겠다.”라는 모습이 예상되는데

그렇지 않고 자신의 탐심을 고집한다면

저부터 오늘 고린도전서의 말씀처럼 종말론적으로도 그리고 현재적으로도

하느님 나라를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 “이제 슬슬 너무 애매한 거 아니야?”란 질문이 떠오르실 겁니다.

먼저 현대인의 성경으로 번역된 같은 본문 고린도전서 6:9-10을 보겠습니다.

 

의롭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속지 마십시오. 음란한 사람과 우상 숭배자와 간음하는 사람과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과 동성 연애자와 도둑과 탐욕이 많은 사람과 술 취하는 사람과 욕설을 일삼는 사람과 착취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제 이야기를 잠깐 해본다면, 여자를 좋아한다는 말씀의 경우

저는 남자이기에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싶은 시선의 유혹에서 비교적 자유롭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매번 마음으로 결단을 합니다.

“아 이제는 내가 정말 주님 한 분께만 내 시선을 고정해야겠다.”

하지만 일어나자마자 말씀을 묵상하기 위해 켠 유튜브 화면에는 제 눈을 자극하는 영상들이 여전히 즐비해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시선을 빼앗겨 하루의 시작을 망치는 경우가 너무 싫고 괴로웠던 것입니다.

 

 

더욱이 갈라디아서 5장 20~21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오로는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제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분을 내본 적이 없을까요?

설사 그것이 겉으로 표현되는 분이 아니더라도

예수님의 기준으로 본다면 제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향한 분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즉, 나 혼자만 아는 음란과 화가 여전히 제 마음에 있으며 이를 분명 회개했는데

왜 자꾸 이런 마음이 들지? 하는 그런 딜레마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싸우는 걸 지금도 멈추지 않습니다.

또 싸우기 위해 오늘도 은혜받을 준비를 합니다. 죽을 때까지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서에서 방금 말한 그런 싸움이 전혀 없는 것,

싸우려고조차 하지 않는 그런 마음의 태도(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복음이 방종으로 흐르는 것)

사도 바오로는 경고합니다.

이를 현대적인 가르침으로 바꿔 말하면 구원파의 가르침과 동일합니다.

 

 

분명 갈라디아서 5장이 말하는 당 짓는 것이나 서로 하나 되지 못하는 모습은 분명 넓은 의미에서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극복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려고 하지 않는 게 바로 오늘 바오로가 말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렇게 분열하고, 당 짓는 이들에겐 현재적인 하느님 나라 임재인 사랑과 기쁨과 평화가 있을 수 없고,

더 나아가 인간의 행위인 오래참음과 친절, 선행 역시 괴로울 것이며

헬라주의의 윤리인 신실함과 온유, 절제는 부담스러운 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오로는 이를 지적한 것입니다.

 

저는 오해했습니다.

길을 가다 예쁜 여성을 볼 경우, 예쁘다라는 인식조차 갖기 싫었던 것입니다.

이유인즉슨 내가 까딱 잘못하면

다윗과 같이 범죄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그 여지가 싫어서였습니다.

 

 

하지만 성소눈 그 가능성을 전 인류에게 죽기까지 분투해야 할 싸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은 해석은 로만 가톨릭뿐만 보수적인 개신교회인 칼뱅주의에 이르기까지 모두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죽기까지 충성함으로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또 어떤 사람은 그 유혹에 넘어진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느님께서는 만세 전에 예정하신 자신의 자녀를 결코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이 같은 은혜를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할 경우,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일찍이 개신교회 내 장로교 신학의 맹점이라면 이중예정론에 따른 그릇된 안정감일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 더 분투하도록 채찍질하는 마음을 멈추고, 이 정도면 타협해도 되겠지? 하는

바로 그 마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재적으로도 우리가 그렇게 살지 않는 경우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며 기쁨이 상실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의 분투가 종말론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접속하는 걸 결정한다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두려움이 엄습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문제는 현재적인 하느님 나라에 접속하는 그 여부와 관련해서는

종말론적인 문제의식이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서는 말합니다.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와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가 연결되어 있다.

 

 

 

제 자신한테는 찔림이 되고, 하느님 말씀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 글을 적습니다.

 

고린도전서 말씀을 보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죄를 이야기하면서

이를 현재적으로 임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종말론적으로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을 마치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율법 조항으로 해석하여 법률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 본 말씀은 법률로 판단할 조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이익을 한 번이라도 범하면, 하느님 나라에 못들어간다? 이런 말이 아니고,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저뿐만 아니라 누가 과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만일 그러하다면 신약 성서는 쓰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면 신약성서는 그리스도인들(믿는 자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권면하는 내용인데  권면한다는 것은 그렇게 못 살 수 있고 또 그렇게 못살기 때문에 권면을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본 말씀은 마치 법조문처럼 판결형식으로 볼 일이 아닌, 관계로 보아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는데 바람을 피우겠습니까?

당연히 바람을 피우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지나가다 예쁜 여자를 보면 눈이 돌아가는 게 사실이거든요.

이는 본능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눈이 돌아갔을 때의 제 마음이 어떠했냐면

“아, 내가 지금 내 배우자에게 해서는 안 될 일을 다시 말해, 신의를 저버렸구나란 탄식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자꾸 멀리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점점 배우자와의 관계가 더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오로의 말은 고전 6:9, 갈 5:23, 엡5:5에 나와있듯

악한 일을 행하면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쉽게 말해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바람 피울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설사 바람을 피우더라도 그렇게 핀 바람에 대해서 탄식과 자책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것이고,

이로 인해 점점 그 바람 피우는 마음에 대해 멀어져 점점 관계가 가까워져 가는 것이지,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도 바람피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점

또 나아가 그런 생각에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 게 바로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라는 것은 바로 그런 탄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게 잘 나오는 본문이 로마서 8장인데 로마서 8장을 보면,

성령을 통해서 우리 속에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끊임없이 탄식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분명한 것은, 오늘날 우리 보수 쪽에서 믿음을 이야기하면서

행함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한 경종으로 사도 바오로가 언급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그런 상황에서 봐야지 그렇게 알고 있지만 그렇게 실제로 100% 완벽하게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100% 못 이루면 너는 천국에 못들어간다라는 의도로 해석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곡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분들의 경우,

지금 그래서는 안된다는 마음을 다 가지시고 이 글을 읽는 줄로 믿습니다.

괴로워서 이 글을 읽는 것 아닙니까?

그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즉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만 예쁜 여자를 보고, 눈이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눈이 돌아간 다음에 아, 내가 이러면 안 되지, 나에게 자기 인생을 건 사람이 있는데 하며

그 선택을 자책하고 다시 돌이켜서 그 사람에게 집중하려고 하는 마음,

이런 마음이 바로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마음이고, 그것이 성화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그런 자들이 하느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 가운데도

헬라주의의 전통으로 오래참음이나 인내 이런 영역들을 덕으로 삼는 스토아주의, 불교가 있습니다.

그럼 그런 사람들 같은 경우 예수님과 성령이 그 마음에 없지만

분명 다른 의미에서의 신의(信義)를 지키는 데 그럼 그 신의(信義) 전체를 자기의(自己義)로 보아야 할까요?

 

이는 마치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사랑합니다.

그럼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믿느냐? 그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믿으면 스토아 학파에서 나타나는 덕목들이 분명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느님이라는 실체를 만나 생긴 부산물 또는 파생하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없는 그런 덕목들은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즉, 천국이란 것은 우리가 어떤 착한 일을 행했다고 주는 상급이 아닌, 하느님을 내가 만나고,

내가 하느님 안에 있을 때 누리는 평안과 기쁨, 희망, 영광 이런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을 만나는 것 속에서 그게 하느님 나라의 천국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스토아학파와 무신론을 주장하는 불교에는 하느님이 없지 않습니까?

그 결과 자연히 하느님의 나라인 천국 역시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질문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랑이 있습니까?

 

사랑에서 제일 중요한 게 하느님 사랑이지 않습니까?

두 번째는 이웃 사랑이고 말입니다.

 

하지만 스토아학파와 불교에는 하느님 사랑이 부재합니다.

물론 이웃 사랑은 그들도 다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이웃 사랑에는 하느님 없는 이웃 사랑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하느님이 있는 이웃 사랑과 하느님이 없는 이웃 사랑은 뭐가 다르냐면

하느님이 있는 이웃 사랑은 에베소서에 나타난 하느님에 구원의 목표가 바로 때가 찬 경륜인

이는 온 세상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말하는 이웃 사랑은 그리스도가 없는 몸입니다.

다시 말해, 그냥 몸일 뿐입니다.

 

물론 그리스도가 없는 몸도 좋습니다.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사랑하고 돕는 걸 부정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머리가 없습니다.

더욱이 실체가 없고 방향이 없으며 중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 역시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공부합니다.

거기까진 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는 목표와 목적이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으로 말하면 건물이 만들어졌습니다,

아주 든든하고 탄탄한 건물을 스토아학파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만들 수 있고, 교회에서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건물이 하느님의 거처로서의 건물입니다.

하느님이 거하셔서 그 가운데에 임재하셔서 자신의 백성들과 교류하는 그런 집인 셈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경우 집은 집이기에 견고한데 거기에는 하느님의 임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천국이 마치 우리가 잘하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급이 아니란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 앞에 뭔가 착한 일을 하거나, 선행을 하거나 경건한 삶을 살면 하나님이 나를 천국으로 인도해줄 것이다? 또는 천국이란 상급을 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니까

이렇게 하면 내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없을까? 이를 계속 계산하는 거거든요.

 

하지만 그런 문제가 아니고, 천국은 하느님의 나라이지 않습니까?

천국(天國)의 한자 뜻풀이를 하면 결국 하늘 나라인데 하늘 나라는 사실 하느님의 나라잖아요.

다시 말해,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계신 곳이구요.

그래서 하느님이 임재해서 자신의 백성들과 긴밀한 교제가 일어나는 것,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거기가 하느님의 영광이 있고, 하느님의 기쁨, 또 하느님의 빛이 있는 것입니다.

즉 천국에서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존재 자체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러면 하느님과의 교제를 하면 그것에 대해서 하느님이 잘했다고 하느님께서 천국을 주는 게 아닌

교제 그 자체가 바로 하느님 나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교제는 이 땅에서도 우리가 경험하기 때문에

땅에서도 우리는 현재적인 하느님의 나라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의 거처는 끊임없이 사탄의 공격을 받아서 불완전합니다.

그게 문제인데 주님이 오시게 되면

그 모든 유혹과 넘어지게 하는 사탄의 세력이 불과 유황불에 영원히 갇히게 돼서

우리가 그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온전히 하느님과 하나됨이 이루어지니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학수고대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개념을 give and take 보상개념으로 보시면 안 됩니다.

그러면 늘 불안합니다.

하느님 한 분을 내가 누리고 즐기고 그분과 함께하는 것이 행복한 걸 경험하신 성도님이라면

결코 하느님이 나를 떠날 것이라는 이런 두려움은 가지실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저 길동은 항상 미래의 종말보다 현재의 종말을 강조합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