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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4일 목요일 신명기 21:1-23 이미 패역했는데 그럼 평생 쪼그라들게 살아야 하나요?

by 정직한 글쟁이 2024.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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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4일 목요일 신명기 21:1-23

이미 패역했는데 그럼 평생 쪼그라들게 살아야 하나요?

 

방탕하고 술에 잠긴 아들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로 신앙 안에서 자라야 할 자녀가 가정의 신앙을 따르지 않고

부모님에게 반항한다는 것은 곧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에 대한 반항이라 그렇다.

그래서 그 완악한 아들을 부모는 성문 앞의 재판정으로 데려가 재판을 받게 해야 한다.

아들이 진실로 부모에게 반항했다면 그 결과는 마을 사람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는 것이다.

허나 아무리 아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도

이렇게 아들을 죽게 할 부모가 어디 있을까?

 

그런데 혹시

또 내가 오류가 없는 하나님 말씀 앞에

인간적인 물타기를 하는 건 아닌지 한편으로 걱정이 앞선다.

 

그런데 초대교회 이후부터 속사도, 교부, 종교개혁자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전통은

이 규례의 목적이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닌 두렵게 만드는 것에 방점을 찍었다.

 

진실로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는

자녀교육의 문제도 한 가정의 문제로 보지 않고

마을 전체의 문제로 봄으로 인해, 자녀에게도, 그리고 하나님의 대리자로 선 부모에게도

모두 동일한 경각심을 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학적 전통은

“지옥에 관한 성서의 기록마저 모두 단순히 겁주기 위한 용도였나?”란 의문이 들게 했고,

과연 그 문자적 의미의 경계를 어떻게 정하고, 또 어느 부분이 현대에까지 계승되어야 할 진리인지

또 오늘처럼 겁주기 위한 용도인지 그 분별을 하기 참 어려웠다.

실제로 초대교회 교부 오리겐은 천국에 이르기 위해

마태복음 19:12절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거세를 했고,

아시시의 프란시스코는 재를 뿌리고 밥을 먹었다.

 

이런 문제의식만 갖고 현실에서 적용점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

성경 읽기는 지루하고 따분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칼뱅, 칼뱅하며 교조주의에 갇혀 신학을 재진술 하며 세상에 눈과 귀를 막고 살아가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나의 한때 자유주의 스승님이

“어디 사랑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이 좀 죄지었다고 평생 지옥 불에 심판하시겠어?

심판하시더라도 잠깐 연옥 불에 담그시겠지”란 생각이 왜 들 수밖에 없었는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죄악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신앙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신앙공동체 안에서 사람의 가치, 그 숭고한 의미, 인격적인 존중을 누리게 하소서.

때론 제어하지 못하는 죄악을 함께 억제하게 해주는 역할도 하게 하시며,

메시야로 오신 주님이 고난받으심으로 우리를 죄와 허물의 속박에서 해방하신

참 인간의 가치, 창조된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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