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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피하라, 자유로운 믿음의 구원과 은혜를 향해

by 정직한 글쟁이 2023.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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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만의 이상한 신학에 대해 이제는 말할 때가 된 것 같다.

 

(스압 주의 : 길지만 내용이 매우 유익)

 

한국교회가 만든 이상한 신학이 있다.

이런 식이다.

분명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는데

이제 그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남은 삶, 주님을 위해 봉사, 헌신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제대로 못하면

마치 배은망덕한 사람인 양 헌신을 강요한다.

그러다보니 쥐어 짜듯 믿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자꾸 훌륭한 인물들을 내세운다.

아브라함같은 믿음, 야곱같은 믿음 운운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것 아는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기 위해 칼을 들었을 때

우리는 그 칼 든 아브라함의 믿음만 바라본다.

 

그러나..그가 이 사건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서 저지른 아주 치명적인 오류들,

특히 자기 아내의 권유로 아내의 하녀

하갈을 취해 이스마엘을 낳은 사건은

하나님의 언약에 정면으로 도전한

무모하고 무신앙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아브라함은 75세부터 25년간 하나님의 그 언약,

네 몸에서 날 자를 통해

네 후손을 축복하시겠다고 하는 이 언약을

자기 방식대로 이루려 했다가

여러 번 실패를 겪은 사람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믿음 없음을 경험한 사람이다.

그런 그였기에 100세에 낳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이 아들 이삭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그는 믿음으로 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이 좋아서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아들을 향해 칼을 들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이

그를 믿어주시고 기다려주시고 참아주셨음을 그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 하지만

그 믿음이 사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믿어주신 하나님의 믿음이라 봐야 옳다.

 

뿐만 아니라 야곱도 그렇다.

그가 형 에서를 만나기 전에 모든 가족과 소유물을 강 건너에 모두 다 보내고

자신만 얍복강 가에서 홀로 있을 때에

천사가 나타나 그에게 씨름을 한다.

 

 

그러자 하나님의 천사된 자가 더 이상 씨름을 할 수 없다면서

 야곱의 골반뼈(환도뼈)를 부러뜨리는데

야곱은 그 큰 고통 중에도 반드시 자신에게 복을 달라며 천사의 샅바를 놓치 않는다.

 

그 때 천사가 그의 이름을 바꿔준다.

"너는 이제부터 야곱(속이는 자, 사기꾼)이 아니라 너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이스라-엘 이라"

 

그래서..많은 신앙인들은 이 본문을 근거로

끈질긴 야곱의 기도와 인내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는 복을 받게 되었다고 해석한다.

그럼 질문드리겠다.

하나님이 정말 사람에게 질 수 있는가? 그게..전능자 맞나?

분명 하나님은 야곱에게 지신 것 같아 보이나

가만히 보면 져 주신 것이지 야곱이 이긴 게 아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믿음을 마치 쥐어짜듯

인내의 화신이 되어 기도했더니

무언가를 주신다라는 공식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마지막에는 자신의 공로가 들어간다.

그리고 위선자가 된다.

자신의 행함이 은혜보다 앞선 자가 된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많이

기도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며, 헌금하고 전도하고 예배 생활, 기도생활 충실히 했다는

은근한 자랑질이 있다.

 

한 마디로 자기 공로가 은혜보다 앞서는 것이다.

위선자는 늘어가고 결국은 뭐니뭐니해도 머니가 제일이라고

헌금 많이 한 교인이나 장로 권사가 큰 소리칠 수 있는 구조로 변질되어 간 것이다.

이게 한국교회 신학의 타락을 주도했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목회자들 역시

하나님이 인간들을 위해 그 귀한 보혈을 흘려

십자가에서 우리들을 구원하셨거늘 구원받은 우리들은 도대체 뭘하고 있느냐고?

헌금하고 헌신하여 하나님의 교회, 성전 잘 짓고 주의 종 잘 섬기고,

교회 일 열심히 하고..이런 식의 강요를

너무너무 많이 해 왔다.

 

그러니까 감사해서 감사하여 해야 할 헌신이 아니라,

감사하지? 그럼 00해! 그게 도리야! 그게 사람된 성도된 도리야! 이런 식의..

명분을 만들어 헌신과 헌금을 강요해 왔다는 말이다.

 

그러다보니 평생..

내가 아는 한..60년 이상 교회를 목회하시고 은퇴하신 고향 교회 목사님도

어느 주일, 심방을 마치고 나를 만나 한숨을 내쉬며 넋두리처럼 하셨던 그 외마디..

"결국 교회도 보면 다 돈이야 돈..돈 없으면 죄인이야.."

나는 이렇게 말하시는 목사님을 보며 피가 끓는 분노를 느꼈다..

10년도 더 지난 이야기지만..기억은 생생하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바로 가르치고 바로 믿도록 하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구원얻을 수 있는 믿음이란

결국 "내 믿음"이 아니라는 것,

 

나에게 주어진 믿음은

너무나 갈대와도 유사해서

이리 흔들, 저리 흔들이다.

 

 

 

 

그럼..내가 기분 좋고 일이 잘 될 때는 구원이 있는 것 같고,

내가 몸이나 상황이 안 좋을 때는 구원이 사라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라도 하면

나는 믿음이 없는 자인가?

그럼 믿음으로 받았다는 구원도 흔들리는 것인가?

그런 거지같은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같은 죄인들,

연약한 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속아주시며 기다려주시며 믿어주시는 그 믿음!

그 하나님의 믿음이 진짜 믿음인 셈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다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물론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할 때 구원이 이루어지지만,

돌아보면 내가 죄인임을 고백할 수 있음도

그 분을 나의 구주로 영접할 수 있음 그 자체도

내 노력, 내 애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믿음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에게 내려주신 그 구원이라는 것도 알고보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완전한 선물이다.

 

그 선물에 0.0000000000000000000001%의 인간의 어떠함(노력, 애씀, 의지)은 개입됨이 없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은 구원받게 말씀을 전한 후 이어서

곧바로 헌신과 헌금과 봉사와 애씀을 요구한다는 게 큰 문제다.

매 번 교회에 모일 때마다

오히려 우리같은 자들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고

감사하며 노래를 해도 부족할 판인데..

구원의 은혜는 10, 그리고 90은 온통 노력, 애씀,

성경의 인물 누구를 본 받으라..~을 해야 한다..이런 부담만 지우고 있으니

교인들은 분명 구원이 감사하긴 한데 뭔가 짐스럽고

무엇인가 죄책감이 들며

평생을 더 회개해야만 할 것 같은 이상한 분위기가 우리를 압도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을 뭔가 요구하는 이상한 하나님으로 변질시키나?

왜 자기 아들을 주시기까지 하신 그 고마운 분을

우리는 무섭고 벌 주며 무언가를 자꾸 요구하며

기대치를 높이는 부담스러운 하나님으로 전락시키는가?

 

이게 정말 성경적인가?

 

아니면 한국교회 자체가 만들어낸 전통적 신학인가?

무엇이 옳은가?

 

나는 이 문제를 공론화하여

모든 교회들이 구원에 관한한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도 손상하지 않는

신학과 신앙의 체계를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 은혜에 근거한 신학, 신앙, 목회, 헌신을 요구하는 게 성경적이라 믿는다.

언제까지 하나님을 주식회사)예수 기업의 총수로 인식해야 하나?

언제까지 하나님이라는 분이 우리 삶과 무관한 저 하늘에서 쯧쯧하며 혀만 차시는 하나님으로 오해하게 만들껀가?

 

 

이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다신 그 깊고 큰 은혜에 대한 배신이며 모욕이다.

이제 잠깐 멈처서 바로 보자!

그리고 바로 믿고 마음껏 자유하자.

그리고 그 자유함으로 감사하여 무슨 일이든 행하자.

성 어거스틴의 말로 마무리한다.

 

 

Dilige et fac quod vis
"하나님만 사랑하고 네 마음대로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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